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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Jul 23. 2019

게으른 천재 프로그래머가 만든
음악에 열광하는 이유

UNDERTALE OST (2015)  - TobyFox

1. 서론

인디게임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더테일(UNDERTALE)이라는 게임에 대해서 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언폭도'라고 불리는 게임 유저들과 '샌즈'라는 특정 캐릭터에 심취한 저연령층 게임 유저들의 스포일링으로 인해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게임이기도 하지만, 나는 메타픽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게임의 진정한 가치가 그러한 선입견으로 인해 폄하되는 것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번 글을 통해 언더테일의 서사적 측면보다는 메타픽션 작품으로서 본 게임이 갖는 특징과 게임 내 배경음악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 TobyFox - 게으른 척하는 게임 제작자

이 게임은 'TobyFox'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1인 게임 프로그래머에 의해 개발된 인디 게임이다. 게임 용량은 150메가 정도(PC 스팀 버전 기준)밖에 되지 않는 저용량이며, 실제 통상적인 1회차 플레이 타임도 10시간 이내 정도로 굉장히 짧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이 게임은 통상적으로 게임 속 세계관 바깥에 해당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세이브-로드' 개념을 직접적으로 스토리에 관여시키며, 한 번만의 플레이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떡밥들을 다회차의 플레이를 통해 확인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이 게임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번의 플레이를 거쳐야 하며, 세이브-로드의 횟수에 따라 이를 인지하는 등장인물의 대사 변화와 같은 변칙적인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게임 내 이스터 에그까지 모두 확인하고자 할 때는 단순한 배수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제작자의 분신이자 게임 내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캐릭터 '짜증 나는 개(Annoying Dog)'가 게임 내에서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고 게으른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인데, 나는 이러한 기믹이 제작자를 게으른 천재로 보이게끔 만든다고 생각한다. 게임의 상대적으로 작은 볼륨과 짧은 플레이 타임이 게으른 요소에 해당한다면,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메타픽션의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게임을 심오하게 만드는 점이나 게이머가 으레 가상세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그의 천재적인 면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제작가가 의도치 않았음에도 어쩌다 얻어걸린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마저도 게으른 척하는 제작가가 의도한 바인지도 모른다.


3. TobyFox - 게으른 척하는 작곡가

언더테일은 게임 내 배경음악 또한 훌륭하다. 처음 들었을 때는 8비트의 레트로 감성을 구현하고자 제한된 소스로 단순하게 찍어 낸 미디 음악 같아 보이고, 게임의 배경 무대에 따라 시종일관 바뀌는 음악 또한 유심히 들어보면 게임 내 기본이 되는 가락을 다양한 버전으로 편곡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1인 제작자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게으름 내지는 한계점을 지적하는 것 같지만, TobyFox는 그러한 한계점조차 게임 내 메타픽션의 소재로서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언더테일에는 '몰살 루트(Genocide Route)'라고 하여 게임 내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보이는 대로 학살하는 게임방식이 있다. 이 게임의 캐치프레이즈가 'THE FRIENDLY RPG WHERE NOBODY HAS TO DIE(게임 내에서 그 누구도 죽을 필요가 없는 롤플레잉 게임)'인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플레이 방식은 제작자의 의도에 반하는 것인 셈이다. 일정 조건의 학살량을 달성하면 그간의 노가다를 보상이라도 하듯 이전과 비교해 매우 높은 확률로 배틀 시스템과 주기적으로 조우하게 되지만, 정작 전투 화면에서는 그 어떤 적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윽고 커맨드 창에 등장하는 단 한 문장.


* But Nobody Came.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후 예상치 못한 음산한 배경음악은 게임의 분위기를 급 반전시키며 무분별한 학살에 대한 업보마냥 플레이어의 심리를 불편하게 한다.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낮은 기계음이 천천히 울려 퍼지는가 하면, 어떤 장면에서는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지는 기계음이 마치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듯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트랙이 해당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별도로 작곡된 악곡이 아니라, 기존에 쓰인 정상적인 악곡을 과도하게 배속을 늦추어 삽입한 것이다. 언더테일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컨트롤하는 주인공의 성격과 세상도 그에 맞추어 상호작용하게끔 만들어 놓았는데, 게임 내 음악 역시 동일한 소스의 음악일지라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도록 제작자가 의도한 셈이다.


몬스터의 일정 학살량을 달성하면 등장하는 음산한 배경음악. 하지만 이를 빠르게 재생하면 천진난만한 게임 내 다른 배경음악이 된다. (출처: 유튜브 Thunderb0lt)
친근하게 주인공을 따라다니던 꼬마를 죽이려는 장면에서의 배경음악. 하지만 이를 빠르게 재생하면 일반적인 적 인카운터 배경음악 소스가 된다. (출처: 유튜브 Thunderb0lt)


이러한 음악적 맥락은 위에서 언급한 몰살 루트를 플레이할 때에야 그 의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여기서 필자의 마음을 잘 대변한 유튜브에서의 한 댓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

What I like about the genocide route is that the game itself tries to get you to quit the genocide route. 

(내가 몰살 루트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게임 그 자체가 당신이 몰살 루트로 게임을 진행하려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Ruins (fear) - The game uses the "But Nobody Came" encounters to scare the player into resetting. When it first happens, players who don't know about it get really freaked out by the creepy encounter and the disturbing music.

(폐허 지역 (두려움) - 게임은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인카운터 방식을 써서 플레이어를 게임을 리셋하고 싶게끔 겁에 질리게 한다. 이 현상이 처음 발생하면 이에 대해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소름 끼치는 인카운터 방식과 심란하게 만드는 음악에 자제력을 잃게 된다.)


(중략)


The game has pretty much given up by the time you reach Sans. Sure, he's hard, but if the player didn't quit at Undyne the Undying, why would they at Sans? After Sans, you're at the point of no return. Even when you choose not to destroy the world, its too late now. Since when were you in control?

(게임은 당신이 샌즈(최종 보스)에 이르렀을 때쯤에는 이미 당신을 포기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깨기) 어렵지만, 불사의 언다인(최종보스 버금가는 난이도를 지닌 중간보스)에서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었다면 샌즈라고 한들 포기하겠는가? 샌즈(를 물리친) 후에, 당신은 더는 돌이킬 곳이 없다. 설령 당신이 세상을 파괴하지 않기로 선택할지라도 이미 너무 늦은 셈이다. 언제부터 당신에게 선택권이 있었는가?)


(출처: 유튜브 'Undertale OST - In My Way Extended' 동영상에 달린 AndyTheAwesome 유저의 베스트 댓글)


위의 댓글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면면을 파헤치기 위해 몰살 루트를 선택했으나, 게임 속 세계관의 입장에서는 세계에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플레이어가 작용하기 때문에 음악을 비롯한 게임 속 장치가 어떻게 플레이어로 하여금 몰살 루트로부터 탈선하게 하려 애쓰는지를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몰살 루트를 진행한 플레이어는 어떻게 해서든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세상을 파멸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되고, 결국 게임은 악한 기운에 영혼이 잠식당한 존재로 주인공을 묘사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씁쓸한 죄책감을 느끼게끔 유도한다. 언더테일이 메타픽션을 적절하게 활용한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차치하고서라도 언더테일에 사용된 음악의 멜로디는 그 자체로 탁월하다. 이미 널리 알려진 샌즈전에 쓰인 'MEGALOVANIA'라든가 듣는 것만으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를 것만 같(다고 쓰고 실상은 중2병 갬성을 한껏 돋우는)은 'Hopes And Dreams' 외에도 상당히 인상적인 트랙들이 OST에 다수 존재하며, 유튜브 뮤직에 있는 수많은 언더테일 관련 헌정 음반과 오케스트라 협연이 단순히 게임 속 배경음악을 넘어선 음악 자체로서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몰살 루트 보스전에 쓰인 'MEGALOVANIA'. 겁.나.어.렵.습.니.다. (출처: 유튜브 Toby Fox)
유저들 사이에서 진엔딩으로 일컬어지는 불살 루트(Pacifist Route) 보스전에 쓰인 'Hopes And Dreams'. (출처: 유튜브 Toby Fox)
언더테일 5주년 기념 오케스트라 콘서트 실황. (출처: 유튜브 UNDERTALE Official)

4. 마치며

훌륭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작품을 감상한 자가 자신의 삶을 한 번쯤 돌이켜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면 그 역시 훌륭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 있어 언더테일은 나의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명작이다. 나의 삶을 돌이켜보게 한 점에서도, 창작자로서 훌륭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도, 나 같은 게이밍 컨트롤이 극도로 달리는 사람이 샌즈전을 클리어하도록 밤을 새우게 만든 것에 대해서도.


이미지 출처: 스팀(S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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