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zé - 아이유(IU) (2015)
연일 인터넷이 아이유의 새 미니앨범 'CHAT-SHIRE'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의 토론에 후끈하다. 앨범 발매를 앞두고 터진 장기하와의 열애설에도 끄덕 않고 호기 좋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본 앨범은 얼마 가지 않아 보너스 트랙의 샘플 클리어런스 문제를 시작으로 'Zezé(이하 '제제'로 칭함)'의 선정성 논란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더니, 급기야 타이틀곡 '스물셋'의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아이유의 로리타 콘셉트가 기막히게도 제제가 갖고 있는 논란의 속성과 들어맞으면서 거센 뭇매를 맞기에 이르렀다. 아이유를 옹호하는 누군가는 예술행위를 함에 있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아이유를 비판하는 누군가는 예술에도 지켜져야 할 윤리적 금기가 있다며 아이유의 행보에 지나침이 있음을 꼬집는다.
옹호자와 비판자가 따로 떨어져 나와 그들만의 싸움으로 변질되던 와중, 아이유의 공식 사과문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아이유에 대한 비판의 입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아이유의 사과문에 실망을 금하지 못했다. 실망한 이유의 골자는 '대답할 수 있는 것만 골라 대답하고,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 혹은 대중이 아이유가 작금의 상황에서 보여주길 바라는 행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이 영악하다'로 요약되는 듯하다.
여기서부터는 필자의 의견이다. 워낙 말이 많은 이슈인지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매우 조심스럽지만, 필자가 예정에 없었던 본 리뷰를 서둘러 작성하는 것은 지금껏 인터넷에서 드러난 사례와는 조금 더 다른 시각에서 본 사건을 조명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구 하나 결백한 이 없이 우리 모두가 잘못했다.
본 앨범이 아이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밀도 있게 담긴 셀프 프로듀싱 작품이라고 했을 때, 필자는 아이유가 비정규 앨범의 일종인 미니앨범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을 십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높이 평가했다. 피지컬 앨범 시장이 무너진 현재의 음악시장에서 비정규 앨범 제작은 (특히 아이돌 음반을 중심으로) 제작비를 줄이는 동시에 정규 앨범에 비해 판매 차액이 크지 않은 미니 앨범 제작에 집중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상업적 의도를 지닌, 팬덤을 상대로 한 굿즈 장사로 비칠 때가 많다. 때문에 음악적 퀄리티와는 별개로 미니 앨범의 형태는 정규앨범과 차별화되는 어떠한 음악적 특색 없이 그저 정규앨범을 강제적으로 반토막 내는 작업에 그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음악시장이 황금기였던 과거에는 많은 작가주의 가수들이 소위 'n.5집' 또는 미니앨범을 통해 기존의 정규앨범 작업과는 구별되는 음악을 시도해왔고, 이는 마땅히 존중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러한 맥락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아이유의 이번 앨범은 참신한 시도였고,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에 선 그녀가 아티스트로서의 입지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초석이었다. 게다가 full-length 앨범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의 프로듀싱 실력을 실험해 보기에도 적합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아이유가 국민 여동생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안전지대 삼아
자신의 생각을 너무 관대하게 표현한 와중에,
아이돌로서 기획사에 의해 주조된 로리타 이미지가 잇달아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두 개의 문제를
하나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소수의 (분노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녀가 직접 써서 논란을 빚은 제제의 가사는 정서적인 면에서 로리타 이미지와 기가 막히게 교차됨으로써
아이유의 사상이 철저히 소아성애자의 그것으로 대변되는 듯한 장면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본 앨범이 아무리 아이유의 셀프 프로듀싱 앨범이라고는 해도 아이유의 의지가 100% 순수하게 투영된 앨범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아이유는 어디까지나 한 소속사의 기획된 가수이며, 아티스트의 싹을 지니고는 있지만 소속자의 입장에서는 아이돌로서의 상품성이 훨씬 더 크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스물셋'의 뮤직비디오를 위시한 과거의 행보에서 줄곧 일관되게 의심을 받아 온 로리타 콘셉트는 사실상 인간 이지은(아이유의 본명)이 지닌 그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소속사가 가수 아이유에게 덧씌운 이미지라는 점이 보다 설득력 있다. 물론 우리는 아이유가 실제로 소아성애자적 측면이 있는지, 혹은 소속사에 의해 어느 정도 그러한 사상에 길들여(?) 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스물셋'의 뮤직비디오 콘셉트와 '제제'의 가사는 별개의 문제이며, 하나로 묶어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전체 이용가인줄 알았던 아이유의 노래가 알고 보니 청소년 관람불가(,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범죄의 영역이 될 수 있는)의 그늘을 은연중에 들여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느낄법한 대중들의 혼란과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허나 어디까지나 이 두 개는 시기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별개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소속사가 덧씌운 로리타 콘셉트가 아이유 개인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보는 바, 가수 아이유 자체만을 향한 순수한 비판은 제제라는 곡으로 보다 한정되어야 한다. 아이유는 제제를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단편적인 이미지를 끌어와 전혀 다른 판타지를 써 낸 결과물이라고 했다. 아이유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정독하고 작가의 의도를 올바르게 파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으나,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아이유가 그러한 가사를 쓴 것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 한 켠에 가학적이고 성적인 찰나의 충동, 약간의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이유의 행동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그런 혼자만의 발칙한 상상을 모든 대중이 이해해줄 것이라고 너무 쉽게 믿은 관대함이다. 아이유는 모든 대중이 아이유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윤리적인 잣대에서 반대에 부딪힐 상황을 충분히 고려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자신만만했으며, 자신이 올라온 위치가 미칠 수 있는 원하지 않는 영향까지 충분히 살피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그렇게 응답할 것이었다. (앨범 재킷에 쓰인 망사를 신은 핀업걸 포즈의 제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노래와 궤를 같이하므로 언급을 생략하도록 하겠다. 단지 그러한 발칙한 성적 판타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더욱 노골적으로 불쾌감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이 노래에서 확장된 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앨범 전량 회수 또는 제제 음원 서비스 중지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며 아이유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묻고 있으나, 아이유와 소속사는 현재 이에 대해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아이유와 소속사 모두의 문제라고 본다. 수익과 연관되는 부분이다 보니 아이유 측의 이해관계만 내세울 수는 없다는 뜻이다. 설령 아이유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싶어 해도 어디까지나 소속사가 이를 불허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쪽이 되었건, 우리는 비판의 대상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본 작은 아이유의 셀프 프로듀싱이라는 원대한 희망에서 출발했지만, 갖가지 논란과 표절 시비로 멍들고 얼룩져 본연의 취지가 상당히 색이 바랜 듯한 모습이다. 아이유는 일련의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적지 않은 이미지 실추를 겪었다. 아이유가 좀 더 오랫동안 가수로서 사랑받길 원한다면, 소속사는 비록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이번 앨범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중의 분노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예술에 대한 나름의 명분이 있더라도 결국 아이유는 대중을 상대로 소통하는 대중가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평론가의 이론이나 사상이 아무리 위대하고 논리적이라 한들, 세상이 지금 아이유를 향해 이렇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필자는 우리 모두가 전체적인 그림을 보았으면 좋겠다.
아이유에게는 '엉망으로 굴어도 사람들은 내게 매일 친절해요'라고 자만한 것에 대해 유감을,
소속사에게는 아이유가 지닌 아티스트로서의 생명력을 단기적으로 소모하는 것에 대해 유감을,
그 밖의 우리 모두에게는 어린 혹은 맹목적인 청자들에게 문화 콘텐츠를 올바르게 수용할 수 있는 문화환경 또는 성숙한 윤리의식을 100% 조성해 주지 못하는 현 세태를 살아가고 있음에 유감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제대로 읽고 공감하고서 비판하는 것이냐며 조롱하는 이에게는 조롱하는 대신에 다른 시사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긍정의 말로 치환하지 못함에 유감을.
츄르르카, 우린 왜 우릴 탓해야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