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사라졌다4

붉거나빛나거나

by 고요

40대 중반을 넘어서며 몸에 병이 찾아왔고 급기야 단식을 했다. 주변에선 아픈데 왜 단식하느냐고 의아해했지만, 나에겐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벌써 20여 년이 되어가는데 아토피가 있었던 8개월 된 아기와 4살 된 아이를 데리고 지리산 아래 화순으로 단식을 배우러 간 적이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경험했던 것을 내 몸이 아프니 다시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몸에 관한 공부도 하게 되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몸에 관한 공부로 그치지 않았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었고 만들어진 그릇의 모양과 질에 따라 담긴 마음이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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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연결되었기에 감정의 상태, 즉 마음에 의해 질병은 들고 나는 것이다.


분노는 간을 상하게 하고 슬픔은 폐가 주관한다. 근심이 많으면 심장을 상하게 하고 불안과 두려움이 깊으면 담을 허하게 만든다. 오장육부는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하다. 칠정(七情)이 지나쳐도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모든 감정이 마음에서 나올 것 같지만 몸까지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 역시 물질처럼 내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타고나길 간 기운이 센 사람은 화를 자주 내면서 기운을 많이 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 안에는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고 오장육부는 상생과 상극이 있다. 시작하게 하고 성하게 하는 것이 '상생'이라면 '상극'은 서로를 제어함으로 오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의 장기가 기운을 과하게 쓰면 상극의 장기가 그것을 조절하게 된다. 간담이 기운을 써서 넘치면 비위가 그것을 제어한다는 것으로 무엇이든 '발산'을 하면 '수렴'을 거치는 시간이 이어지게 된다. 몸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마음도 분명 ‘상생상극’이 존재하고 감정도 ‘발산’하면 ‘수렴’하게 된다.



KakaoTalk_20240315_103523639_03.jpg 2014년작


몸에 관한 공부와 새로운 일을 하면서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기적처럼 잃어버린 돈이 다시 채워졌다. 그림을 그만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지만 시간은 많은 것을 회복시켰다. 벌을 받았으니 수감생활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약속한 대로 얼마 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3년의 세월을 이렇게 단 몇 줄의 글로 요약하고 나니 마치 쉽게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문득문득 지난 시간을 생각나면 아직도 가슴에 돌 하나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무게는 비교할 수 없게 가벼워졌다. 지나온 시간은 분노의 시간이었고 억울한 날들이었다. 그리고 목구멍까지 가득 찬 슬픔을 끝없이 비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낯선 풍경을 본 순간 어디에선가 본듯한 익숙한 감각이나 감정을 기시감이라고 하는데 기시감의 반대말은 미시감이다. 늘 마주치는 환경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매일 오고 가는 길에서 새로움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감각기관을 열어 두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새롭게 발견하기도 하고 어제의 것이 사라진 것도 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 지나간 어제의 서사 위에 얹어진 것처럼 지금의 평온함은 그동안 나를 스쳐 갔던 분노와 억울함, 슬픔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보았던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해도 그 끝은 끝이 아닌 것처럼 감정은 삶의 연속성 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KakaoTalk_20240315_103523639_24.jpg 1996년작

어느 날은 슬픔을 밀어두고 어느 날은 외로움을 숨기며 그 순간 함께 하는 이들과 새로운 감정을 나눈다. 현실은 변하지 않지만, 감정은 변화할 수 있다. 다양한 감정이 혼재된 상태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환경에 접속하는가에 따라 상호작용되는 것이 감정이다. 유홍준의 ‘안목’이라는 책을 보면 궁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하는 글을 보면서 인간의 감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입구부터 안쪽까지 한 번에 보이는 경복궁과 달리 땅의 모양에 따라서 길을 내고 건물을 앉힌 창덕궁의 모습처럼 인간의 감정도 환경과 상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변화하고 수용하는 감정은 일방통행이 되기 어렵다.


골짜기가 많고 깊으면 산이 높듯이 굽이굽이 다양한 감정을 인지하고 지혜롭게 대응하면 된다. 행복도 슬픔도 외로움도 분노도 우리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내밀한 감정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자발적 의사로 꺼내 쓸 수 있다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KakaoTalk_20240315_103523639_01.jpg 1997년작


요즘 약속을 많이 잡지 않고 계획도 많이 세우지 않는다. 강아지를 아침저녁으로 산책시키며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김훈의 소설‘개’에서 나오는 개처럼 강아지의 생각과 감정을 읽는다. 코를 이리저리 킁킁거리며 연신 움직여대는 강아지가 사랑스럽다. 말은 못하지만 감정은 나눌 수 있다.


나의 감정이 비어있으면 더 쉽고 정교해진다. 강아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람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멀어진 태양 너머 간절한 마음으로 애처로운 달을 끄집어낸다.




각자 다르게 움직여야 서로의 존재감이 빛나는 해와 달은 늘 공존한다.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드러난다. 사람의 감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달이 보인다고 해가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감정 하나가 순간 불거져 나오지만, 안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함께 존재한다. 다양한 감정들은 사이좋게 지내다 어느 순간 선별될 것이다. 마치 해와 달처럼.



어제는 작업실 앞 벤치에 앉아 바람의 소리를 담으면서 핸드폰으로 360도 영상을 찍었다. 나무가 빼곡한 곳이라 가지의 움직임과 바람 소리가 선명하다. 나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쉽게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뜨거운 여름이지만 해거름이 되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쑤욱하고 더운 열기를 몰아내고 있다.


그리고, 화가 나는 모든 것이 슬퍼하는 모든 것이 바람의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KakaoTalk_20240315_103523639_15.jpg 2015년작


욕구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슬픈 감정은 외부의 자극에 예민하게 된다. 민감함을 사소한 것을 감지하게 한다. 불현듯 작은 것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감정은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다. 아마도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다양한 감정들을 주도적으로 꺼내 쓰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결국마음의 고요함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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