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는 날입니다. 돌아가신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이 늘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벌써 오래전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세월의 흐름이 참 빠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기다리시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계획하셨던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그래! 새로운 것을 배운 거야!"
실패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배웠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죠.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맨날 배우신댄다" 하시면서 핀잔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늘 '허허'하고 웃으셨지요. 그때는 두 분이 그저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는 것 정도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말씀이 지나가는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깨달아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몸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기가 시작하기 전의 겨울에 종로의 YMCA의 유도교실에 등록을 하고 두 달간을 배웠지요. 부모님께 상의드리지 않고 혼자서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유도연습을 하다 보니 어찌나 노곤했는지, 집에 와서 밥을 먹고는 바로 자야만 했습니다. 공부에 지장이 많아서 그만 두기로 마음을 먹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냐중에 강제로라도 계속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그만두어도 좋다."라고 엄하게 말씀하시고는 계속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나는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서 떳떳하다고 생각을 했지요.
당시에 같이 유도를 시작했던 친구들은 모두 검은 띠의 유단자가 되었고, 원하는 학교에도 모두 합격을 했습니다. 입시가 끝나고 나니 그때서야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뜻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때 강하게 권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지요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깨닫고 새로워지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늘 하시던 말씀처럼 "그래! 새로운 것을 배운 거야!"라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경험해야 할 과정
나는 뭔가를 할 때는 집중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지속하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지요.
대학입시는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해 냈을 뿐이지, 몸을 기르는 일이라든가 특별한 재능을 키우는 일은 자주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은 일주일에 3시간이었습니다. 그중 2시간은 달리기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학교처럼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시킨 곳도 드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체육시간에는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지요. 그리고 체육시간이 끝나고 이어지는 수업시간에는 졸음이 몰려오곤 해서 수업시간에 자주 졸았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럼에도 체육시간의 수업방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내내 그 힘든 수험공부를 무난히 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체력 덕분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떤 때는 사흘 정도를 꼬박 밤을 새우면서 공부를 할 정도의 체력이 있었으니까요.
삶에서 실패가 없으면 스스로 하는 능력도 커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늘 엄하셨지요.
결혼을 하고 나서 이런 일이 있었지요. 마당이 있는 집이었는데, 바깥쪽 아궁이에 환기구를 뚫고 싶으셨던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망치와 끌을 주시면서 아궁이 벽을 뚫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뚫기 시작을 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두들겨도 뚫리지가 않더군요.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부당한 지시에 화가 가득 차올랐습니다.
투덜거리며 뚫고 있는 내 모습을 보시던 아버지께서 웃으시면서 아내에게 말씀하시더군요.
"아이고 성진이 봐라. 조금 있으면 병나겠다."
나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시키실 일을 시키셔야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을 시키시니 그렇죠."
이렇게 말하고는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내 방으로 가 버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손수 구멍을 뚫으셨지요.
내가 강해지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였지만, 나에게 강요를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것이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남자 형제만 네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둘째였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에게는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으셨습니다. 나에게만 시키셨죠. 그것도 나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표현
"성진아, 공항까지 운전 좀 해 주겠니?"
늘 바쁘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운전을 시킬 일이 별로 없으셨는데, 그날은 나를 부르시더군요.
기쁜 마음으로 운전을 해 드렸습니다.
공항으로 가던 중 잠깐 차를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포장마차가 있는 곳이었지요.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소주를 따라 드렸는데, 아버지께서도 저에게 한잔을 주시더군요. 그리고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한잔을 하니 참 기분이 좋구나!"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해 주셨지만, 내가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히 사랑받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아버지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그런데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아버지께서는 나의 중요한 일에는 항상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도 함께 하셨고, 중학교 입학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늘 함께 해 주셨는데, 평상시에 뵐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그것을 느끼지 못했지요. 앨범을 들춰 보면서 그때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아버지는 내가 깨닫고 스스로 할 때까지 늘 기다리셨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부지런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닮아가려고 노력을 하며 살았던 것을 이제 기억을 합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양육
아이들을 양육할 때 부모는 늘 조급함을 가지게 됩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더 많은 것을 잘 익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컸으니까요.
다행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딸은 대학시절부터 유학을 갔기 때문에 내가 하나하나를 체크할 수 없는 환경이었죠. 그래서 모든 일을 스스로 해 나가야만 했지요.
그렇게 스스로 해 나가면서 4년간의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면서 상당히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불안하기도 했겠지요.
아마도 아내와 내 도움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려면 며칠간 병원을 닫아야 했기 때문에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지요. 그렇다고 국제전화로 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SNS가 아주 일상화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늘 자신 있게 자기의 일을 해 나가던 녀석이 전화를 해 왔습니다.
"아빠, 내가 택한 것이 나에게 맞는지 모르겠어. 바꿔야 할까 봐."
당시에 나는 사이토 히토리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한 젊은이가 고민을 상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치 딸에게 답변을 준비하라고 주어진 것처럼, 대답하기에 딱 맞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네가 선택한 것이 정말로 너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해봐."
딸은, "알았어요......" 하고 힘없이 전화를 끊었지요.
그런데 그 이후로 며칠간은 통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까요.
결국은 원래의 목표대로 원하던 대학원에 합격이 되었습니다.
합격자 발표 날, 아내와 꽃시장에 가서 꽃을 사고 있었는데, 가슴이 조마조마했지요.
전화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이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저 붙었어요!"
아버지라고 해서 자기 자신이 확신할 만큼 앞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아버지도 계속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저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아이를 양육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기다림이란 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서두른다고 빨라질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서두른다고 빨라질 것도 없습니다.
서두르면 오히려 원래의 목표에서 멀어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지요.
우리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인내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변하기 힘든 인간이 변하기를 지금도 기다리시고 계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