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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by 오성진

오래전에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기억이 납니다. 삶을 포기하려고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던 한 사람을 붙잡고 펑펑 울고 있던 한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뛰어내리려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좀 아려 오기는 했지만, 펑펑 울던 그 여자의 마음이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와 관계된 일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지요.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과 마음


시간이 흐르면서 삶의 의미라는 것에 관한 생각이 깊어져 갔습니다. 많은 성취를 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음은 늘 공허했고, 의미에 대한 답은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의미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확신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삶이 뭐야? 이런 생각이 늘 가득했지요.


새벽에 기도모임, 성경공부 모임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었지만, 그것이 일상생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배운 것이 생활화되지 못하고 있었고, 마음은 늘 무거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다가 빅터 프랭클의 책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파고들었지요.


삶에는 연마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죠.


치과의사가 되어 환자를 치료하는 기술을 배우지만, 그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될 때는 좋은 치료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받고 있는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치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치료라는 것은 사실 엄격하게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서, 환자와의 사이에 때때로 편하지 못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의료인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일은 하고 있는 일에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신뢰받을 만큼 숙련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의 훈련과 연마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의료인에게는 수련기간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 외에는 관심을 두기 쉽지 않지요.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매일의 일과를 소화하기에도 시간은 늘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삶을 의미 있게 가꾸어 나가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에게 "삶의 공부에 하루 몇 시간을 사용하세요?"라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그런 공부가 꼭 필요할까, 생활 그 자체가 공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 아닐까요?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적지는 않습니다. 다만 생활화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죠.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몸에 배야 하는데, 가끔 떠오르는 생각이 몸에 밸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만이 삶에서 활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뇌는 모든 것을 패턴으로 인식합니다


뇌는 수많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패턴으로 인식을 합니다. 모든 정보를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요새는 SNS를 통해서 아침부터 자리에 눕는 시간까지 좋은 이야기를 수도 없이 보거나 듣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죠. 보고 들을 때는 마음이 기뻐집니다. 변할 것 같은 생각도 가득하지요 사람들 간의 관계, 마음 다스리기 등등에 관해서 좋은 지혜를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 그것이 떠오르던가요?

나중에 떠오르면서 "아…..." 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기억이 납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시라서 본문 기억은 전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회할 일이 생길 떼마다 떠오르는 시집의 제목입니다.

사실 몰랐기 때문에 아쉬운 일을 남긴다고 하기보다는 알면서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용서하라고 배웠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가슴에 남는 아픔이 되는 것이 아닌가요?


삶에서 만나는 많은 허들(hurdle)


장애물을 마주하지 않는 순간이 있으셨나요? 잘 생각해 보시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에도 긴장하지 않고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것은, 그 장애들이 나를 어렵게 할 수 없는 가벼운 것들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집 안에도 수 없는 위험이 가득합니다. 주방에는 조금만 소홀하게 다루어도 손이 베이거나, 미끄러지거나, 부딪힐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대처하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죠.


나는 초등학교 2학년 겨울에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집안에서 말이죠.

반가운 친구가 놀러 왔습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신나게 뛰어 나갔죠. 그런데 현관 가까이의 마루에 물이 얼어붙어 있었던 것을 몰랐습니다.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덕분에 두 달을 쉴 수 있는 감사한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어쩌면 부모님보다 먼저 멀리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리면 어린 대로, 성숙하면 성숙한 대로 마주해야만 하는 장애물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것에 걸려 넘어지고 한참을 허우적거리곤 하지요. 그리고는 원망을 합니다. "누가 여기다 이걸 놔두었어!"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원망을 안 했겠지요? 더욱이 많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면,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자기 자신이 안전하게 치워 놓았을 것이죠. 그러면서 좋은 일을 했다는 마음으로 즐거워했을 겁니다.


장애물이라는 것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들은 때때로 놀이동산에 갑니다. 그리고 놀이기구 중에서 스릴을 즐기려고 뜨거운 햇빛이 내리 쪼이고 있고 긴 줄이 늘어서 있는데도 기다립니다. 잠깐의 스릴을 즐기려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 놀이기구는 매우 위험한 것이죠. 조금만 규칙을 어겨도 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기구라서 , 이용하기 전에 철저하게 안전점검을 받습니다.


바닷속을 구경은 더욱 엄격합니다. 기구에 조금의 흠이 있더라도 바로 생명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번지점프는 안전점검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때때로 사고가 일어나지만, 그런 놀이기구들이 금지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사람도 없겠지만, 누군가 그런 법을 만든다면 모두들 코웃음을 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면, 도전하는 일이 없으면 삶은 그야말로 재미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말이죠.


많은 장애물들을 넘어오면서 깨달아 온 것이 있습니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 뒤에는, 내가 깨닫기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 의미라는 것은 나의 삶을 더 누릴 수 있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더 강인해져야 하고 더 넉넉 해저야 하고 더 여유로워져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삶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도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엔가 도전하려는 사람이 아무런 공부도 없이 하면, 그 결과는 눈에 보듯 뻔하죠. 요새 말로 비디오를 보듯이 분명한 것입니다


삶이 끝나기 전에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삶이 고통스러워서 다리 위에서 투신하려는 사람을 붙잡고 펑펑 울었던 그 여자의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삶의 소중함을 아셨던 것이죠.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셨던 것입니다. 단 한번 주어진 삶, 그리고 삶이란 언제라도 장애물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계신 분이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투신하려는 분에게 그 마음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죠.


경영을 하다 보면 늘 경험하는 것입니다만,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서 한 달 내내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월말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 월급을 준비해서 나눠주지요. 그리고 한숨을 돌리는데, 앞을 보니 다시 월급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재미있나요? 지나고 보니 재미있습니다만, 당시로서는 고통이었지요.


내 주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때때로 극한을 선택하고 싶었다는 고백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 고비를 넘겼던 사람들이죠. 한참 잘 나가다가 갑작스러운 위기로 앞이 막막해진 그들은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순간에 빠졌기 때문에, 공황상태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나 삶의 원리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붙잡힐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와 50년 넘게 형제처럼 지냈던 친구가 메르스가 유행하던 그때에 중병에 걸렸지만, 입원할 병원이 없이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꿈이 참 많은 친구였지요. 시카고 대학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었다고 허풍 아닌 허풍을 떨 정도로 공부를 했던 친구였기에 아쉬움이 더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지요. 그 친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이죠.


애인과 다투다가 다리 난간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여성, 아내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해서 다리에서 뛰어내려 버린 친구…...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삶을 버립니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죠.


수년 동안을 인간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수형 번호 만으로 자신이 존재했던 아우슈비츠에서 살았던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로 인해서 삶의 소중함이 증거 되었던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삶의 의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잠언은 '지혜의 글'이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들 중에서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더라도,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지금 나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삶의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고통은 자신의 고마운 선물이었고 선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갑니다.


삶의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시간에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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