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굿 헌팅 - 러브, 데스 + 로봇 시즌1(2019)
√ 스포일러가 엄청납니다. 원치 않는 분은 읽지 않으시길 추천합니다.
☞ 러브, 데스 + 로봇(Love, Death + Robot) 시즌1 중에서
굿 헌팅(Good Hunting)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니메이션 / 18부작 옴니버스
☞ 2019.03.15. 넷플릭스 방영 / 절대 성인용
☞ 작품 관련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아직 마법과 요괴가 존재하던 시절.
랑은 요괴 퇴치를 업으로 하는 아버지와 함께 구미호를 쫓는다.
랑은 아버지 손에 죽은 구미호의 어린 딸 옌을 보호한다.
세월이 흘러 랑의 아버지는 죽고, 마법은 사라졌다.
마법의 자리를 대체한 기술은 폐쇄적인 동양보다 개방적인 서양에서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랑도 홍콩으로 가서 철도 일을 시작한다.
랑은 기계를 조작하는 일이 즐거웠다.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랑은 기계공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로봇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른다.
한편 랑을 따라 홍콩으로 온 옌은 마법의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힘을 상실한 옌은 삭막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겨웠다.
그러다가 고약한 악당에게 육체를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옌은 랑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랑은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그녀의 잃어버린 구미호를 재현한다.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러브, 데스 + 로봇>이라는 작품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특히 짧은 러닝타임에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아놓은 메시지는, 오랜 시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다듬어진 시나리오로 완성된 것 같다.
미국 회사인 넷플릭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에서 중국 설화에 등장하는 구미호가 나왔다!
흥미가 생겨 검색해봤다.
구미호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전해오는 상상 속 동물 중 하나이다. 꼬리가 아홉 개 달렸다 하여 구미호(九尾狐)라 부른다.
구미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해경(山海經)>이라 한다.
중국 고전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 등장하는 '달기(妲己)'가 구미호의 전형적 캐릭터이다.
미인으로 둔갑해 남자를 홀려 파멸시킨다고 알려져 있으며, 본모습으로 변신했을 때 날카로운 발톱과 날렵한 몸놀림 등 초자연적 힘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의 구미호는 에도시대에 정립되어 3대 요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동화책 <회본삼국요부전(繪本三國妖婦傳)>이라는 기록물이 유명한데, 중국 고전소설 <봉신연의>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것이 특이했다. 달기의 몸을 차지했던 구미호가 셋으로 나뉘어 흩어져 각각 중국, 일본, 인도에 출몰해 악행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인데, 일본으로 건너간 구미호는 천황을 유혹하려다가 음양사에게 정체가 드러나 살생석(殺生石)으로 변했다고 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구미호’라는 구체적 기록은 없다고 한다. 대신 여우 귀신, 여우 요괴, 늙은 여우로 표현된 기록은 있다. [참고 : 다음백과]
어린 시절에 TV에서 방송했던 <전설의 고향(1977)>에서 구미호 전설을 처음 보았던 기억이 난다. 때문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설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넷플릭스가 중국의 구미호를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역사적 자료를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삼국유사>와 <고려사> 등 문헌에 짧게 소개된 요괴 여우는 ‘구미호’와 같이 뚜렷하게 지칭되는 이름이 없는 탓에 하나의 캐릭터로 선택받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전설의 고향>뿐 아니라 구미호를 다룬 국내 작품은 많다.
영화 <구미호(1994)>, 애니메이션 <천녀여우 여우비(2006)>, 드라마 <구미호 외전(2004)>,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2010)> 등이다.
우리가 문명의 발전으로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일까?
기계 기술을 너머 첨단 IT 산업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재, 이제 이런 판타지나 마법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으로만 남아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면서 ‘상품’이 되어 버렸다.
이 작품에서 옌이 마법의 힘을 잃고 보통 여자가 되어, 생존을 위해 스스로 ‘상품’이 된 것처럼 말이다.
랑과 옌은 무엇을 잃은 것일까? 왜 철도공과 창녀가 되었을까?
이것은 서양 국가들의 발전에 근본적 원동력이던 산업발전의 결과가 비교적 낙후된 아시아 국가들을 침탈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거대한 역사적 폭력은 서양 문물의 유입을 유도했다.
물질은 신비로운 동양인들만의 정신적 가치를 자본주의 사고방식으로 바꿔놓았다.
랑은 살아온 터전을 떠났고, 옌은 정체성을 잃었다.
이처럼 작품에서 구미호나 마법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낭만’이나 ‘꿈’, ‘추억’ 등 정신적·감정적인 것들로 보인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현실을 반영한 경제’의 굴래 속에서 넘쳐나는 정보와 기술에 허우적대느라, 오히려 ‘낭만’이나 ‘꿈’ 따위를 사치로 생각하는 경향마저 생겨났다.
최백호 님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 가사처럼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느낌은 ‘시대적 허무함’과 ‘대중 속에서의 외로움’ 등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극복되기보다는 냉정하고 비정한 감정으로 굳어져 점차 사회 전반을 삭막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이 작품 <굿 헌팅> 말미에 기계 기술을 이용해서 다시 구미호로 돌아가는 옌의 모습은 과학이 마법을 대체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기계 형태의 구미호는 결코 그녀가 그리워하는 모습은 아니다.
옌은 자신의 정체성과 육체를 빼앗아 간 산업화와 거기서 생겨난 부를 힘의 원천으로 하는 권력자들을 향한 복수의 도구로써 어쩔 수 없이 기계 구미호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선택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침략자의 기술을 배우는 랑과 그토록 증오하는 기술을 이용해 힘을 만드는 옌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제 마법과 낭만은 사라졌고, 사냥하고 처단하는 구미호만 남았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