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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Dec 24. 2022

‘새로움’에 대한 고찰 #1/2

일상으로의 회귀 - 정치·사회편

‘새로움’은 ‘새롭지 않은’ 것에서 온다


‘새롭다’라는 말은 아주 긍정적인 말이다. 기존에 없었던 신선한 느낌을 주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새롭기 위해서는 ‘새롭지 않은’, 즉 헌 것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사람이 살아온 역사의 흔적을 보자면, 사람들이 늘 새롭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기존에 있던 어떤 현상이나 문화, 사회, 정치적 결정 등에 대립되는 ‘새로움’이다. ‘새롭다’는 것은 기존의 것과 대립하고 현재의 상황을 바꿔내고 싶은 욕구에 맞춰진 개혁적인 성질을 가져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이 원리에 들어 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역사의 개념도 이 ‘새로움’을 바라는 인간의 욕구에 기본적으로 동조한다. 좋게 말하면 새로움에 대한 기대, 나쁘게 말하면 ‘기존의 것과의 단절 내지 부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인가가 새롭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새롭지 않은 것에 대한 충분한 익숙함이 전재되어야만 한다. 무엇이 잘못인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새로움’의 이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이것이 새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별하는가?

고루하고 만족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무조건 이미 새롭지 않은 그 무엇인가? 이처럼 기존의 새롭지 않은 것에 대한 이해 없이는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의미’의 탄생은 바로 이분법적 차별의 구도로 이어진다. 기타 다른 가능성은 배제되어야만 합리적인 듯, 새롭지 않은 모든 것은 구시대적인 유물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무엇이 생겨나면 그 순간 바로 이전의 모든 것은 새롭지 않은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개념을 먼저 미시적인 잣대로 생각해본다.

한 개인에게 새로움이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자기 자신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 사회적인 공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어떤 깨달음일 때, 그것은 새로움이라기보다는 보통 스스로 느끼는 어리석음에 대한 각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개인 혼자서 바꿔놓을 수 있는 변화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나 인류 전체에 관여하여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한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수보다 현재 우리가 겪는 개인적 새로움도 결국 타인과 엮어지는 사회적 이슈 내에서 내 사고방식을 고찰하는 새로움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 자체가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필연이다.


그래서 ‘새로움’에 대하여 거시적인 관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관여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 국가적으로, 정치적으로 주체성이 훼손된 현대인의 머리 구조에는 개인적으로 주체적인 개념이나 생각보다, 사회적으로 이미 익숙해져 있어 자기 자신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관념에 의해서, 그 안에서 사고하고 그 안에서 느끼고 파악함으로써, 지극히 어떤 한계와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그 문제 자체를 스스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지만.


이렇듯 개인을 떠나면 바로 사회, 즉 공동체에 대한 또는 타인에 대한 느낌과 사고로 이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과 발달의 합리성에 익숙해질수록 인간은 사회적인 대칭성을 부정한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막대한 권력, 힘, 체제, 사상,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서 개인적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적이지만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 법, 질서, 규제 등 개인을 억누르는 제도가 가시나무처럼 둘러쳐진 공동체다. 다만 이 공동체는 합리적이고 모두를 위한 체계를 유지함으로써 개인적 욕구보다 모두가 함께 공존하고 발전하기 위한 암묵적인 약속을 전재로 이루어진 것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에 앞서 그 부정 자체가 합리적이고 대중적으로 타당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발전상이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흐른 것이라 생각한다. 힘 있는 특정한 누군가를 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함께 상생해갈 수 있는 미래를 생각하기에 수많은 개인의 희생과 타협 아래 이루어져 온 것이다.


이제 ‘새로운’ 2023년의 해가 곧 떠오른다. 새로운 ‘새로움’ 앞에 선 것이다. 그러나 우린 생각해야 한다. 과연 며칠 후에 떠오를 새로운 태양이 과연 ‘새로움’을 의미하는 태양인지, 아니면 범 인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와 사회, 개인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우리의 나아감이 오히려 수십 년 이전의 이데올로기 시대로 후퇴하는 것은 아닌지를.


새롭다는 것은 헌것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헌것의 개념도 무작정 헌것 이전의 헌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미 우리가 경험해보고 절대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어떤 지점이라면, 과연 시대적인 오류에 의한 회귀 역시 현시점에서 바라볼 때 새로움이라 해야 할 것인가?


괴롭고 힘들었던 삶과 민중적 고뇌의 세월을 지나며 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던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 오히려 역행의 바람을 타고 과거로 회귀한다면, 그것이 과연 ‘새로움’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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