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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Dec 24. 2022

‘새로움’에 대한 고찰 #2/2

일상으로의 회귀 - 정치·사회편

새로움은 1도 없는 2023년의 대한민국


새로운 해를 눈앞에 둔 현재,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대한민국에 새로움은 1도 없음을 느낀다.

오히려 새로움이 없는 현실에 대해서, 아니, 과거로 크게 후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감내하고 익숙해지라는 강압과 차별, 권력 아래 엎드려 스스로 알아서 처신하라는 폭압 외에 그 무엇도 없다.

밑바탕에 온통 거짓과 편협, 욕심과 차별만이 가득하다면, 이를 어찌 ‘새로운’ 내일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으랴. 비록 오늘날 자본에 잠식되어 먹고 자고 입고 보는 모든 환경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정말 가치 있고 지켜야 할 기본적인 생명과 인권, 윤리와 도덕, 자유와 평등, 희망과 미래 등,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지켜내려 했던 모든 것이 훼손된 다음에야 과연 ‘새로운’ 그 무엇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요즘, 마치 나라를 잃은 것만 같다. 이 문구를 요즘 몇 번째 쓰는 것인지 모르겠다. 비단 나만 그러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21세기 새 문명의 과도기 시점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기에 슬프기까지 하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내부적으로 대립하며 서로 헐뜯고 벗겨내기 바빠 외세의 침략에 힘없이 당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2022년 12월 현재,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은 선제 타격이 가능한 군 개혁을 전 세계적으로 떠들며 합리화하고 있다. 북한이 목표라고? 북한으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있나? 구석으로 몰린 강아지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혼자서도 충분할 강대국 여럿이 뭉치는 이유가 합리적인가? 혹시 다른 목적이 있음을 사실 그대로 말한다면, 시대적인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고?


역사적으로 그 증명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어리석은 우리 정부의 결정은 그들에게는 무의미하다.


글로벌 시대의 힘 있는 권력들은 약소국의 결재도장 따위는 애초에 필요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할 뿐, 그 외에 합리적인 타협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일본의 탐욕과 야욕은 이미 조선시대 초기부터 시작된 거대한 군국주의적 책략이었다. 섬나라 일본은 무조건 대륙으로 올라오기 위해서 가장 약한 지점인 우리나라를 끝없이 노리고 있다. 온통 바다로 막혀있는 폐쇄성은 결국 대륙으로의 진출만이 살 길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정책을 밀어붙이는 강대국들도 문제지만, 더 문제는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

우리나라 정치는 21세기, 2022년 12월에 들어섰음에도 말 같지도 않은 ‘보수’, ‘진보’라는 개념으로 나뉘어 모든 역량을 상대를 향한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뭐, 물론 지금이야 일명 ‘보수’로 불리는 극우세력이 득세하여 ‘진보’라 불리는 세력을 거의 학살하다시피 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개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지금 보수가 어디 있고 진보는 또 어디 있나? 사전을 찾아보고 그 말의 뜻을 음미해보라. 우리에겐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저 패를 갈라 상대를 어떻게든 멸망시키려는, 저 조선시대 때 당파싸움, 미움과 시기, 질투와 권력욕에 눈이 뻘건 그때 그대로의 패싸움, 진영싸움, 패거리 외에는 없는 수준이, 딱 지금의 우리 정치 현실이다.

그 목적 또한 편협하고 지질하기 그지없다. 그 목적이라 함은 자신들(패거리)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짓거리다. 즉, 방법이야 상관없이 일단 권력만 손아귀에 넣으면 천하가 내 마음대로 되고, 편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지극히 원시적이고 저능하면서 원초적인 수준이다. 거기에 당연히 국민이고 시민이고 민생이고 이런 건 애초에 없다. 게다가 현재는 이것이 무슨 문화적 현상처럼 일반 시민들에게도 스며들어 거기에 편승해 휘몰리며 끊임없이 편파적 패거리로서, 대립을 위한 분열, 상대 파괴를 위한 공격적이고 자멸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일명 ‘줄 서기’가 살아남는 방법으로 현실화,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역사적으로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를 나는 언어에서 찾는다. 우리 한글은 ‘소리 문자’로 말을 하면서 정해져 있는 뜻 외에는 상기하기 어려운 반면, 영어와 한자는 이미지 글자로 한 단어가 명시적으로 정해져 있는 어떤 무엇을 가리키기보다 머릿속에 관련 이미지로 자리하면서 기본적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상상력을 갖췄다.


물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님들의 노고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한글은 세계 어떤 문자도 표현하지 못하는 표현력과 확장력을 가졌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서 엄청난 가치를 차지할 디지털 세상의 완성 단계로 갈수록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문자 체계를 가진 언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졌어도 황금 자체에 대한 욕심 때문에 거위의 배를 갈라 모든 것을 잃었듯이, 우리의 문화적인 전통과 역사, 민족적인 자부심과 가치, 시민사회의 감성과 공감 등 발전시켜야 할 것들보다는 개인적이고 편협한 욕심을 앞세운 세력의 이권 다툼으로 인해 다수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이게 나라냐?’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또다시 세계 지도에서 사라져 떠도는 사람들이 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새로움’이 새로워야 할 의미 그대로 우리들의 가슴에 와서 닿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새로움’은 현재의 바탕을 제대로 인식하고 각성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 글을 닫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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