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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Jan 02. 2023

울고 싶으면 그냥 울면 된다

집안에서 생긴 일 - 러브, 데스 + 로봇 시즌2(2021)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러브, 데스 + 로봇(Love, Death + Robot) 시즌2 중에서
집안에서 생긴 일(All Through the House)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니메이션 | 8부작 옴니버스
☞ 오픈 : 2021년 5월
☞ 등급 : 청소년관람불가
☞ 작품 관련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어느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윌리엄과 리아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잔뜩 기대에 차서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가본다.

인자한 인상에 배불뚝이 산타클로스를 기대했던 아이들 앞에 나타난 것은, 아이들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존재였다. 그러나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선별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산타클로스의 약속대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선사하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만일 이들이 착한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릿을 만드는 기업체가 초콜릿을 많이 팔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라는 말이 있다. 그런 마케팅 방식에 편승한 것으로 ‘빼빼로데이’라는 것도 있고, ‘화이트데이’도 있다.

이런 마케팅을 목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날짜를 정한 방식 중에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한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지만, 사실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님이 12월 25일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기독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나 특별한 날이지, 범 인류적인 기념일도 아니다.


그런 의미보다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날, 가족들이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의미가 더 와닿는다. 우리나라의 설날이나 추석처럼 공식적으로 가족 모두가 모여 앉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면 거부감도 덜하다.


산타클로스(Santa Claus)는 옛날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 유명했던 ‘성 니콜라오(Saint Nicholas)’ 주교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는 설은, 12세기 프랑스 수녀들이 성 니콜라오 축일 전날인 12월 5일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하며, 유럽 가톨릭 국가들에는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에 가족 중 한 명이 성 니콜라오 분장을 하고 나타나 착한 어린이에게는 칭찬을 하고, 나쁜 어린이는 혼내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모습이 캐릭터로 고정된 것은 1863년 미국의 시사만화가 ‘토마스 나스트’가 잡지에 그린 삽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이후로 노먼 록웰, 푸이스 프랭 등에 의해서 변화되어 왔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여러 사람에 의해 붉은 옷을 입고,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오늘날의 산타클로스로 이미지가 변해왔다. 또한 1931년에는 코카콜라의 마케팅에 이용되며 대중화되었다. 그 외에도 오래된 캐릭터인 만큼 각 국가별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다.

[참고 : 나무위키-산타클로스]


애니메이션 <집안에서 생긴 일>에서는 왜 산타클로스를 저토록 해괴한 형태로 표현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의 이미지가 상당 부분 거짓이자 허구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항의 같은 것은 아닐까 한다.

나 또한 기독교를 바탕으로 설정된 성탄절이나 산타클로스에 대하여 약간의 반감이 있다. 상상력에 더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조금 피력해 보자면,

일단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자한 성품의 배불뚝이 산타할아버지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우선 할아버지라고 호칭되는 것으로 보아 연세가 많은 것 같은데, 단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 어린이들을 찾아다닌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동화나 판타지라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는 거짓이다. 어떤 소망이나 기대가 크다면 그만큼의 실망도 크기 마련이므로 가당치 않은 이야기다.

산타클로스가 슈퍼맨 이상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시간 내에 세상 모든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선물을 나눠준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체력이야 초인의 경지에 있다고 치더라도, 어린이들을 상대로 착한지 나쁜지 판별하는 능력이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역대 초능력자를 통틀어 생각해봐도 그것은 신의 능력이다.

또한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착한 아이보다 선물이 필요한 것은 나쁜 아이일지 모른다. 산타클로스의 행동은 한번 전과자로 낙인찍히면 영원히 전과자로 살아야 하는 ‘사회적 낙인찍기’를 실천하는 방식인 셈이다. 차별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함에도 결국 부추기는 꼴이니 동의하기 어렵다.


캐럴 ‘울면 안 돼(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의 노랫말을 들어보면 경악하게 된다. 이건 무슨, 어린이를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처럼 들린다.

화나고 슬프고 짜증 나면 우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니? 우는 아이를 한번 더 울리는 꼴 아닌가! 게다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다 알고 있고,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 날 때 장난할 때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말이다. 아이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산타클로스는 악덕업주에 동물 학대자이며 무단침입자다.

정당한 보상 없이 요정 엘프들에게 무리하게 밤샘 작업을 시킨다.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디즈니]의 작품을 보면 간혹 나오는데, 비현실적으로 엘프들은 모두가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다.

현실에서 납품 시간을 맞추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을 떠올려보면, 이건 괴리라는 표현을 넘어서 처음부터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생각에서부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게다가 그 엄청난 양의 선물을 만들 재료는 어떻게 수급하는 것일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산타클로스는 얼핏 보아도 몸무게가 상당할 것으로 보이는데, 빠듯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루돌프를 비롯한 순록들을 혹사하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썰매를 만들 정도의 기술력이면 순록들을 혹사하지 않고도 충분히 다른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산타클로스의 상징과 낭만적인 이미지를 위해 고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 명백한 동물 학대다.


또한 산타클로스는 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드나드는 걸까?

백화점 같은 곳에서 산타할아버지 분장을 하신 분들이 직접 선물을 나눠주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요정과 같은 산타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직접 받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는 증거다. 그런데 진짜 산타할아버지를 실제로 만난 어린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허락 없이 몰래 들어왔다 가기 때문에 당당하지 못한 것이거나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지 않을까?


어린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것도 문제다. 어떤 의도에서 그러는지 짐작은 되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하는 크리스마스의 의미와도 맞지 않는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어린이도 있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보호받으며 곱게 자라는 아이들이 더 많은 요즘, 세상의 차별과 경쟁을 버텨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말없이 많은 희생을 치르는 부모야말로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이유로 <집안에서 생긴 일>에서 표현한 산타가 차라리 덜 허구적이다.

어른들은 진정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크리스마스도, 산타클로스도 어른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이토록 비현실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교육이나 환경, 미래 등 아이들을 앞세워 계획하는 정책들이 많다. 그러나 꼬질꼬질 늙어빠진 기득권 세력의 이해타산만 가득할 뿐 정작 어떤 정책이나 선택, 결정에 있어 당사자인 어린이나 청소년의 의견은 제외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전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으면서 결정은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처럼 불합리한 경우가 어디에 있나?


구태들의 이기적 정치놀음에 우리 아이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피비린내 나는 경쟁과 차별만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구태라고 욕하면서도 그들과 똑같은 선택과 과정을 거치며 성장할 수밖에 없다. 불공정한 세상이 시간이 지나도 반복되는 이유다.


짧은 단편이지만 거기에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성탄절과 크리스마스의 거짓과 허구는 크다.


울고 싶으면 그냥 울면 된다. 울든지 아니든지, 어차피 세상에 공짜로 주는 선물 따위는 애초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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