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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Apr 24. 2023

길복순(2023) #5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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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사람의 엄마로서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 자체가 너무 광범위하고 다원적이라 정답 비슷한 얘기조차 꺼내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면 영화 <길복순>으로 한정해서 여성이자 엄마인 길복순의 경우는 어느 정도 얘기해 볼 수 있으리라.


일단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여성이 아니므로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한계가 많을 수 있음을 양해해 주길 바란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했다. 물론 보편적이라는 것이 곧 일반적인 부분이기에 가장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만, 어쨌든.


첫째, 길복순과 딸의 생활 어디에도 아버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길복순이 혼자 산다면, 중년의 여성 개인이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겠지만, 딸 재영의 존재가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봤을 때 ‘가족’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개입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길복순 모녀는 남편 또는 아버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부유한 생활 형편임을 알 수 있는데, 실제 직업이야 무엇이든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 있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완전한 삶 쪽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식의 풀이는 아버지(남성)라는 존재가 곧 ‘가정 경제’라는 씁쓸한 공식으로 정당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길복순에게는 사랑하는 남성으로서의 반려자, 동반자라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남편 부재의 문제는 아마 가정생활에서보다 복순의 개인적 측면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재영이 자라고 나이가 들면서 이 부분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는 아이가 어릴 때 크게 드러나고, 아버지의 존재는 아이가 크면 크게 드러난다.


©NETFLIX


둘째, 현재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그 업무 형태가 어떠하든, 누구나 직업적인 스트레스를 겪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두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길복순에게 딸의 존재 자체가 그 첫 번째가 될 것이고, 자신을 칭송해 주는 동료들과 직업적인 안정감(?)과 전문성이 두 번째, 후배 또는 동료와 아무런 감정을 섞지 않은 섹스처럼 자유로운 일탈까지가 모두 해소 방법일 수 있다.


사실 현실의 다양한 직종도 영화 속 ‘살인’에 버금가는 스트레스를 받는 데는 심리적으로 유사할지 모른다.

업무라는 일상의 익숙함에 의해 스트레스도 감정의 일부처럼 담담하게 굳어갈 수도 있다.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스트레스는 물론 업무 자체보다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긴 하지만, 업무 현장의 연장선에서 발생하는 관계이므로 직업적인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다.


고전적인 가족의 형태가 ‘완전’한 거라고 장담할 순 없다. 그렇다고 복순과 재영의 동거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심리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가족’의 형태로 봐야 함에도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가 세상을 보고 배우면서 성장하듯이, 성인도 계속 성장의 과정을 겪는다.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었다고 삶의 끝자락에 도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살면 살수록, 알면 알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늘어가는 것이 삶이다.


이렇게 현실의 삶은 ‘완전함’, ‘영원함’, ‘완성’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 채, 계속해서 걸어가야만 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삶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고, 성별과 관계없이 인간인 이상 결국 완전한 인간은 없다는 결론이 된다. 따라서 완전한 여성 개인이나 완전한 엄마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저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내일의 나 또는 어제의 우리보다 나은 내일의 우리를 위해 노력할 뿐이다.


즉, 삶에 대한 부분은 남성이나 여성의 차이가 아니다. 다만 여성과 남성으로서 개인적, 육체적, 심리적, 경험적인 차이를 획일화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에서 관념화된 차별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게 표출될 뿐이다.


사람은 개인마다 개성이 있듯이 각 개인 모두가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통으로 묶어 대등함이나 평등을 말하면 길을 잃고 대립만 하게 된다.


(#6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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