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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Apr 20. 2023

길복순(2023) #4

자본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계급사회

☞ 스포일러 많습니다. 참고하세요.



차민규가 아마추어와 차별화하자고 제안한 규칙을 말하자, 지금의 사회로 치자면 개·돼지 수준의 군중(모여있는 킬러들)은 별다른 의견이나 질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만다.


장면이 바뀌면서 다시 식당으로 돌아오면서, 한때는 MK ENT의 킬러였다가 지금은 한쪽 손목을 통째로 잃고, 의수인 채 식당을 운영하는 수근(김기천 연기, 참고로 이 분은 드라마 ‘시그널’을 보시면 기억에 남으실 겁니다.)의 대사도 참 직접적이다.

차민규의 규칙 제안에 가장 먼저 동의를 던졌던 그였다. 그러나…


“그땐 몰랐지. 팔 잘리고 회사도 잘릴 줄은, 우리 회사는 규칙인지 지키다가 망해서 퇴직금도 안 나온다니까, 씨부랄…”


하고 말한다. 아마도 세 번째 규칙을 이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의 의수가 애처롭기보다는 약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 좀 해보려 했더니, 아, 글쎄 생각할 틈도 없이 또다시 직접적인 질문으로 대사를 드립 하는 한희성(구교환 연기)의 질문이 터져 나온다.


“왜 세상 규칙이라는 건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들까요? 삐~ 정답! 힘 있는 사람들 더 힘 있게 만들어 주니까!”


저 혼자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고… 이것은 잘난척하는 사람, 남들에게 관심의 중심이 되고픈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잘난 척이든, 관종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대사가 직접적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힘 있는 사람’, 즉 계급사회임을 말한다. 계급사회의 꼭대기에 있는 힘 있는 자, 그가 규칙을 정한다. 그 이유는 힘 있는 사람이 더 큰 힘을 얻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무슨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이 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직시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이어지는 대사에서 희성은 ‘독과점’이라는 단어를 쓰며, 독재화된 시장 경제에 대하여 우회 비판한다.

여기에 길복순이 한 대꾸는 이렇다.


“실력 따라 대우 다른 건 사회생활의 기본이야.”


그녀는 비웃으며 말을 시작해서 말을 끝낸 후에는 무서운 눈으로 희성을 노려본다. 이 자리에 차민규는 없지만, 차민규가 있는 것이다.

길복순은 킬러 조직 내에서도 소수의 엘리트다.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일반 계급 틈에서 이해될 리 만무하거니와 그녀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일반 계급이 다수인 술집 모임에 참석한 엘리트 귀족은 어쩔 수 없이 자조한다.


“분위기 보니까 내가 나쁜 년이네”


하지만 곧이어 이런 말도 한다.


“뒤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남 탓하는 거, 그거 능력 없는 사람들 특권인 거죠!”


자, 여기에서 사람의 계급을 가르고 있는 것은 ‘능력’이다. 무슨 능력인고 하니, ‘사람 죽이는 능력’이다.

주위에서 영웅처럼 떠받들어 주니 자신이 하는 일이 정말로 전문적이고, 대단하게 가치 있는 일인 줄 아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비유는 정통하고 있다.

사실, 폭력이 난무하는 킬러 영화 한 편 보고 나서 무슨 할 말이 많겠느냐 했는데… 영화 <길복순>은 은유와 비유를 통해 현실을 비틀어 꼬집고 있는 작품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 아니라고 해도, 일하는 능력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맡겨진 일을 서투르게 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다. 인간이니까.

그렇기에 혼날 수도 있고, 가르침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절대 상하의 계급 관계가 아니다. 하나의 일을 함께 헤쳐나가야 할 동료여야 한다. 또한 경험이 많고 더 일에 유능하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특혜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NETFLIX


흠…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어떤 일을 먼저 시작해서 한참 더 경험을 쌓아서 새로운 사람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스승이다. 사회에서 경제적인 차이는 당연하다.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그가 노력한 만큼, 그가 희생한 시간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위치를 계급의 윗자리로 인식하고 자신의 지식을 나누는 것을 무슨 특권이나 계급으로 인식하는 것은 곤란하다. 바로 이런 인식 때문에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에서 사회적 계급이라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학생들을 자신과 비교해서 한참 아랫사람으로 생각하면서 개·돼지로 인식한다면, 과연 스승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존경’이란, “나 좀 존경해 줘” 또는 “나 이런 사람이야! 알아서 기어!”, “내가 누군 줄 알아!”라고 소리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게 절대 아니다.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품위 있고, 진실하다면, 굳이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존경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타인의 시선과 인식에 ‘보여주기’ 위한 삶은 나 자신을 위한 삶인 것 같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그들의 의도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현실의 우리에게 사회적 ‘페르소나’를 강제한다. 그것이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와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이런 타성은 자신을 강제했던 강자에게만 아니라 자신보다 약자인 타인에게도 표출된다. 강자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존중이 아닌 꾸며진 자신을 광고하며 살기에 바쁘고, 자신보다 약자에게는 쌓였던 스트레스를 내뱉는다.


미국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 3의 1화 <추락> 편을 보면, 정보화 사회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볼 수 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이 단락의 이해를 위해서 참고해서 한번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아! ‘낭만’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 단어를 <길복순>에서 풀어내는 방식은 참 난해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음에 참 안 드는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길복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한희성은 복순이 두고 간 칼을 돌려주기 위해 길복순을 따라나섰다가, 복순에게 까부는 불량배들을 손봐주고, 그녀와 섹스를 나눈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연민도 아니다. 왜냐하면 복순에게는 별다른 의미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킬러’라는 직업을 ‘연예인’이나 ‘배우’로 치환해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지저분하고 역겨운 상상은 몸에 해롭기에 그만두련다.


이 영화는 현실의 역린과 같은 부분을 떠보는 듯한 느낌이 많아서 진도가 느리다. 게다가 영화에 이런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쪼개 여기저기 너무 많이 담아두었다. 다 다루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그저 거론하는 수준으로 끝내는 것도 있을 것 같다.


(#5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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