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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Apr 15. 2023

길복순(2023) #3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극단을 보다

☞ 스포일러 많습니다. 참고하세요.


영화 <길복순>에서는 킬러로서 받은 의뢰를 ‘작품’이라고 말한다.

‘배우’가 영화나 드라마 촬영에서 멋진 배역을 맡아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상황을 그대로 킬러의 일, 즉 정교하고 완벽한 ‘살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실제로 킬러들만의 공동체가 있고, 길복순은 공동체 안에서 꽤 유명한 킬러다. 다른 킬러들은 그녀를 본받을만한 롤모델로 찬양한다. 이를 잘 나타낸 장면이 있다.

킬러들이 모이는 식당 장면에서 한 젊은 킬러는 길복순의 칼을 휘두르며 놀다가 길복순에게 칼을 돌려준다. 이때 그는 무릎까지 꿇고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며 두 손으로 경건하게 칼을 건넨다. 그러자 길복순은 “재미있게 놀았어?”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칼을 돌려받는다.

길복순이라는 킬러가 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와 더불어 킬러로서의 전문성을 탐닉하는 공동체의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동료 킬러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시시껄렁한 얘깃거리도 못 된다. 그보다 관심을 끄는 건 이번에 길복순이 막 끝낸 ‘작품’이었다.


©NETFLIX


이처럼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킬러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결론에서는 다른 영화에서 보이는 킬러와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기존의 영화에서 다뤄지는 킬러는 아무리 대단한 능력의 전설적인 킬러라고 해도 ‘살인자’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래서 주인공이 킬러인 경우에는 어떻게든 주인공의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위한 장치가 있었고, 그 때문에 관객은 ‘살인’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한다.


<길복순>은 이런 부분을 달리 보여주고 있다. 인간 본연의 보편적인 생명에 관한 인식을 벗어나 생명이나 죄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살인’하는 행위 자체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에게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가학의 익숙함은 알게 모르게 우리 인성을 메마르게 변화시킨다.


또한 이 설정은 우리가 사회(공동체)에서 전문성을 갖춰 성공해야만 한다는 인간의 기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즉, 직업적인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 정착되어버린 현실을 은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에게 윤리나 도덕, 심지어 생명보다도 우선 사항이 되어버린 ‘자본’이 인간 삶에서 지배적인 역할로 자리 잡을 때, 타락하는 정신 수준을 넘어 악마화되는 영혼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자본’이라 함은 킬러들이 살인을 직업으로 삼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의 창작품에서,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사회에서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 모두 이런 형태로 변형할 수 있다. 단지 그 변형에서 ‘킬러’를 선택한 것은 영화적인 볼거리와 현시대의 대중이 바라는 대리만족을 폭력이라는 역동성으로 표현해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현재 영화를 비롯한 각종 영상물의 범람에서 경쟁 끝에 살아남는 방식은 관객의 말초신경을 어떻게 더 자극하는가에 달린 것 같고, 동시에 관객의 말초신경은 점점 더 자극적인 무엇을 원하게 된다.

피가 덩어리 져서 주르르 흘러내리거나 내장이나 뇌수가 터져 나오는 잔인한 장면들이 마치 무슨 흐름이나 대세인 양 19금 딱지를 붙인 영화라면 필수적인 장면처럼 되었다.

악순환되면서 문화가 변질하는 것이다.


그 근본 바탕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와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의 원리가 문화 영역에서도 작용해 온 때문이고, 정치와 사회를 비롯한 전반적인 정서적 감정이 편리와 이익에 몰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길복순>에서 모든 후배 킬러에게 추앙받고 있는 길복순이 내세우고 있는 노하우라는 것이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길복순은 ‘내가 힘이 약하다 해도 상대의 약점을 찾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맡은 일을 성공시키는 것’을 외치고 있다.


영화에서 ‘킬러들’ 최고의 공동체는 ‘MK ENT’라는 회사로 대표된다. 엊그제 개봉한 영화 <존 윅 4>의 세계관이 떠오른다. 이것도 현실의 SM이나 YG, JYP, CJ 등을 빗댈 수 있겠다. 그렇게 보면 킬러들은 소속 연예인들이 되고, ‘작품’은 결국 그들이 일 한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현상은 비단 <길복순>뿐 아니라 요즘 국내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쓰는 방법이다. 바닥난 스토리를 메꿀 비장의 카드인 셈이다. 그렇다 보니 국내뿐 아니라 외국의 유명 작품에서도 부분 부분 떼어와 써먹은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런 부류의 영화에서는 깡패와 전문 킬러의 차별을 뒷받침하는 것은 결국 거대 자본이고, 그 자본이 자의적으로 정한 규칙의 틀이 사회적인 정당성을 갖는 명분처럼 그려지고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틀을 벗어난 한 개인이 거대하게 세력화된 권력과 싸운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의 영웅화다.


차민규가 회사의 규칙을 발표하는 장면을 보면 마치 청부에 의한 살인이 합법적인 글로벌 사업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말한다. 살짝 헛갈리기도 했다. 혹시 영화의 배경으로 특별하게 설정된 세계관일까도 생각했지만, 길복순이 딸 재영이나 학부모들에게 자기 실체를 숨기는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결국 MK ENT는 세상을 속이는 겉 포장이며, 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직업으로써의 ‘킬러’는 ‘프로페셔널’이니 ‘전설’이니 ‘정당한 대우’라는 말로 미화하고 있지만, 결국 ‘생명’을 돈과 거래하는 파렴치한 악인일 뿐이다.


그 조직 안에서도 다시 큰 회사와 작은 회사가 공생관계가 아닌 종속관계로 그려진다. 실제 현실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처럼. 그러므로 이 킬러들의 공동체는 그야말로 윤리나 도덕을 철저하게 외면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말종들과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극단을 표현한 것이다.


(#4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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