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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Apr 11. 2023

길복순(2023) #2

죽이는 건 쉽다? 애 키우는 게 어렵다?

☞ 스포일러 많습니다. 참고하세요.

©NETFLIX


이 영화는 킬러 영화의 전형을 현실에서 생활하는 주부의 모습에 덮었다. 이거 참 위험한 발상이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성하는 세상이라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선한 부분에 악마의 이미지를 덮어씌운 격이다.

세상에서 생명을 빼앗는 악마적인 존재와 가장 거리가 먼 것은 천사일까? 아니, 나는 엄마라고 생각한다. ‘엄마’라는 존재는 생명을 잉태할 뿐 아니라 낳고, 이후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기르는 존재다.

사랑으로 자식을 기르는 엄마의 직업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아야 한다.


재영의 옷에서 담배가 떨어진다. 딸의 담뱃갑을 발견하고 복순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과거에는 청소년의 흡연에 대해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통제가 강력했음을 볼 수 있다. 복순의 아버지는 딸의 얼굴에 심한 상처가 남을 정도로 폭력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담배를 먹으라고 강요한다.

폭력은 분노를 마음에 심고, 분노는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복순은 어려서부터 킬러의 본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하면서 ‘사람’, 특히 기성세대의 어른에 대한 분노로 마음을 채웠을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청소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훈육은 훈육이 아니라 힘 있는 자가 힘 약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행하는 폭력일 뿐이다.

반드시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배운다. 그래서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암울하면 그 사회의 아이들도 암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의 청소년들은 이제 어른에 대한 반항을 청소년으로서 갖춰야 할 하나의 문화처럼 생각한다. 어른들은 길거리에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을 봐도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지나치는 상황이 되었다.

청소년들은 그런 비겁하고 비굴한 어른들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어른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 ‘뭐, 대단한 사람들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별거 아니네’ 하는 심리가 그대로 남게 된다.


정신의 성장에 비해 육체적 성장이 앞서는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신체를 가진 성인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동물들이 그렇듯 덩치가 크고 작음, 불량스러움, 폭력성 정도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여 처신한다.

강한 자에게는 알아서 기고, 약한 자는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마적인 근성이 생겨났다.

동물들은 누가 더 강한가에 따라 먹이사슬을 이룬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 위에 군림하며, 약한 동물들은 강한 동물의 먹이일 따름이다.


어른과 아이의 구별을 벗어나 그저 더 강한 존재로 인간 사회에 자리 잡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가 바로 오래전부터 잘못 가르쳐진 인성이고, 교육이고, 훈육의 결과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 그런 건 이제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얼간이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세상이 된 것이다.


현재 1960년대나 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학창 시절 학교에서 선생들에게 구타당하며 자랐다. 선생님은 하늘이라 가르치던 그 시절에, ‘하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선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한 일이었고, 당하는 입장에서도 그러한 질서가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조금 더 자라서는 군대는 의무라기보다는 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었고, 사회에 나가서도 이러한 불합리한 폭력은 직위와 계급이라는 허위에 의해 자행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위계에 의한 폭력이라는 것, 반민주적인 처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지냈다.


그런 세대가 이제 부모가 되고 사회를 지탱하는 어른이 되었다. 자신들이 겪은 바가 있기에 이것을 바꿔보려고 피를 흘려가며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법도 정비했고, 공공의 가치도 개선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이제 어른과 청소년의 관계에서 나이나 계급, 직위를 막론하고 사회적 폭력은 합리화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생겨났다.


시간이 흘러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다.

딱딱하고 정형적인 법과 원칙,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정화에 치중하다 보니 개인의 정서나 감성, 윤리와 도덕과는 괴리된 생활 문화, 형식적인 교육,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서바이벌식 생존 법칙 따위가 우리 사회를 집어삼켰다.

그 결과, 점차 인간의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점점 생명을 잃는다는 것에 슬퍼하지 않는다. 심지어 경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학여행을 떠난 청소년 300여 명이 바다에 빠져 죽어도, 축제에 참석했다가 압사당한 청춘의 목숨이 160여 명이나 되어도, 우리 사회는 오직 정치 논리에 따른 사회적 대립과 분열 이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그것을 잊어버리는 데도 몇 개월이면 충분하도록 익숙함을 학습당한다.


두 번째는 복순 아버지의 이중성이다.

잠시 비친 사진을 통해 복순의 아버지가 경찰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복순의 아버지는 멋도 모르고 호기심에 저지른 행동이라고 말하면서도 딸에게 담배를 삼키도록 강요한다. 이미 아버지의 폭력에 얼굴은 만신창이다. 거기에 더해 훈육의 방식으로 사용된 것은 기도였다.

이것은 정말 커다란 망상이자 잘못이고, 정신적, 심리적 폭력이기도 하다.


복순의 아버지는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할 사람이지만 인간이자 부모로서 올바른 훈육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사랑으로 세상을 품어야 할 종교를 실천해야 할 사람임에도 용서보다 처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행동은 모순이다. 육체적 폭력도 모자라, 정신적·감정적 학대를 일삼고 있다. 복순이 성장하는 동안 내내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녀가 웃으면서 살인을 즐기는 킬러가 될 수 있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위선과 이중성은 존재하며, 그것들이 세상 모든 것을 갉아먹고 있다.

법을 지켜내 약한 자들을 도와야 할 사람들이 법을 이용해 타인을 괴롭히고, 자기 이득을 취한다. 검사, 판사, 변호사는 공익이라기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칼자루를 쥔 권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약한 자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고난에 힘겨워하는 이들을 구원하고 힘이 되어줘야 할 종교인들도 종교적 믿음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고 종교를 권력화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란 그저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 또는 권력을 쥐기 위해 밟고 올라서야 할 대상이거나 파괴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킬러와 엄마의 조합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다.

가족의 의미도 많이 망가진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엄마다. 아니, 엄마여야 한다.

엄마의 존재마저 이질적으로 변해버린다면, 세상의 모든 엄마를 가진 존재들, 즉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의지하고 마음 둘 곳이 없는 존재들이 되고 만다.


‘사람을 죽이는 건 쉬운데, 애 키우는 게 어렵다?’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어떻게 자식을 기를 수 있나?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선악의 구분, 세상의 모든 종교적 성취, 교육의 의미, 무엇보다 인간 본연! 그 모든 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혹시 쉽게 죽일 수 있는 하찮은 생명이기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아닐까?


(#3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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