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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Apr 26. 2023

길복순(2023) #6

남녀 차별의 근본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 본의가 아니게 스포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과 성과주의가 극단화된 사회는 다름을 우월함이나 열등함으로 구분 짓는다. 우월함에서 품어져 나오는 이기적인 발상으로 타인을 향한 공격성을 합리화한다.


스스로 열등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세상엔 온통 우월한 사람만 있다. 편리한 이분법식 편 가르기로 프레임으로 짜놓고 어느 한쪽을 갑으로, 다른 한쪽을 을로 정해서 얘기를 시작하면, 그 자체가 이미 차별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라 설득은 더 어려워진다.


사회적인 남녀 차별 문제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지 않다. 여성 또한 남성보다 우월하지 않다. 둘은 그저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해결책인 것이다.

문제는 차이에 치중한 나머지 젠더(gender)* 개념으로 접근하기 쉽다는 얘기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시대적 변화에 따른 성평등의 중요성에 따라서 사용하는 단어에도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이런 변화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차별’을 강조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젠더
생물학적인 성에 대비되는 사회적인 성을 이르는 말. 1995년 9월 5일 북경 제4차 여성 대회 정부 기구 회의에서 섹스(sex) 대신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섹스가 남녀 차별적인 의미를 지닌 것인 반면 젠더는 남녀 간의 대등한 관계를 내포하며, 평등에 있어서도 모든 사회적인 동등함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인종 차별 문제를 비롯한 몇몇 ‘차별’ 문제는 궁극적으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닫힌 마음, 즉 보수적인 심리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모둠의 형태가 되어, 힘(권력)으로 변모해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기준’을 상정해 울타리를 친다. 거기에 포함되지 않으면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데서 비롯되며,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성인권운동’에 합류하지 않는 여성을 멸시하는 여성단체의 태도 같은 것이다. 정상적인 여성인권을 위한 단체라면 단체 가입보다는 그 여성의 어려운 점을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거나, 국가 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보복적인 감사를 하거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 등은 모두 그런 부류다.


킬러들의 공동체를 꿈꾸는 <길복순>에서의 MK ENT 역시 튀어나온 못을 뽑는 방법으로 자신들이 스스로 정한 룰을 거역한다.


차별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지만, 분명 문제가 다분한 지난 과거의 남성 권위적인 역사적 흐름에서 관념화된 사고가 하루아침에 뚝딱 변화하기는 어렵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체제와 관념, 관습과 문화적 기억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꼭대기에서 정책 대부분을 주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남성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한 데 주의하길 바란다.

남성의 사회적 권위주의를 옹호한 것은 반드시 남성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왔음에도 여성 차별 문제의 변화는 거의 없거나 더 열악했다. 여성 대통령과 그 뒤의 실세가 여성인 경우에도 권력형 비리, 사회적 권위주의의 행태는 비슷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사회적 부당함과 불공정을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지, 남녀로, 좌우로, 세대 간으로, 지역 간으로 쪼개고 나누어 편을 가르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너무 많아진 정보 창구들로 인해 중구난방 떠들어대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보탠다고 해서 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올바로 인지하는 ‘시작점’부터가 중요한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분명 다르지만, 남녀 차별의 근본은 성별의 다름을 강조해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남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별’이 중요한 것이고, ‘차별’이나 ‘부당함’의 이유가 성별 때문이라는 기반에서 시작하면, 결국에는 ‘여성’의 상대 개념으로 ‘남성’을 함께 살아갈 인류적 동지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게 되고 말 것이므로, 상대인 남성들도 지금까지의 남성들에 의해 공정하지 못했던 부분을 반성하고 함께 개선하려 하기보다 여성을 ‘적(敵)’ 개념으로 인식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차별의 이유’가 ‘성별의 다름’에서 기인한다는 바탕은 옳지 않다.

예를 들어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이 일했는데 남성이 여성보다 급여가 많이 받는다면, 이 차별의 근본이 성별 때문일까?

얼핏 그렇게 보이지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그 회사의 급여 시스템이 불공정한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보다 적은 급여를 받았다는 문제를 ‘여성이기 때문에’에 초점을 맞추면 ‘남녀 차별’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근본적인 불공정에 대한 논의는 성별의 차이, 차별에 가려져 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7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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