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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Apr 27. 2023

길복순(2023) #7

동물의 왕국으로 가는 길

☞ 본의가 아니게 스포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차별’을 하게 될까?

‘차별’은 자신의 ‘다름(남다름)’을 새로운 계급적 차원으로 보는, 우월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마치 히틀러의 나치가 유대인을 대하듯이.


남성이 신체적으로 여성보다 힘이 세다고 우월한 것일까?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보다 우월한 지점이 있다. 서로의 우월한 부분을 앞세우며, 그렇기에 내가 사회적 권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우긴다면, 정말 웃기는 얘기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개는 사람보다 냄새를 잘 맡으니까 그 분야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게 맞다.


사실 성별을 나누어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생리학적 성별 차이를 제외한다면, 성별의 다름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우열을 가져오는가 말이다.


두 사람만 모여도 상대를 무시하며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이고 흔한 경우가 바로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는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부부는 연애 때와는 달리 알게 모르게 두 사람 사이에서 권력을 움켜쥐는 사람이 생긴다.


왜 서로 화합하고 존중할 생각은 하지 못할까? 훌륭하고 이성적이며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인간이면서…


[네이버 국어사전]의 ‘젠더’에 대한 정의를 대하며 또 다른 고민이 있다.

요즘에는 철학적 관념의 정의마저 사회적 정립이 흐트러진 경우가 많아서 명확한 이해가 어려워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저 설명에서 ‘섹스(SEX)’가 왜 남녀 차별적 의미가 있는 말인지 이해되는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남녀 차별은 무엇이며 어떤 실체적인 의미를 갖는가? 그러면 ‘젠더’는 어떤 의미로 남녀 간의 대등함을 내포했다는 것이고, 단어의 인식 변화에 대한 차이는 실체적인가?

특히 그 차이와 실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보편적인가?

어차피 두 단어 모두 우리말도 아닌 외국 문화권에서 정의한 개념이 아닌가! 이 또한 하나의 문화적 침략으로 보기에는, 그 이전에 우리의 문자문화가 너무 망가져 있는 건 아닌가? 그리고 그 망가뜨림의 주체가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라고 본다.

또한 차별의 반대 개념이 명확하게 대등함(상대적으로 같음)인가? 아니면 동등함(모두가 같음)인가? 그리고 대등함과 평등은 같은 의미인가?

나아가 애초에 인간 사회에서 평등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면 왜 그런가? 왜 평등할 수 없는데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다름의 인정과 평등 또는 대등이 공존하려면 무엇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서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동등함’이란 무엇이고, 그 이전에 현재 우리 사회는 과연 남녀가 사회적으로 동등한가와 같은, 수많은 질문과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말은 그 사회적 공동체의 핵심적인 문화적 약속이다.

한때 대중문화가 저급한 문화라고 배척당한 것처럼, 그 언어가 욕설이 되었든 직언이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문화 안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 파괴와 식민지화, 이념에 따라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들은 이런 혼란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마치 언어의 문화적 진보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변화한다면 그것을 사회 보편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우리말은 그런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


차별과 같은 불안정한 요소는 태생적으로 기반이 약하다. 그러다가 자칫 이거다 싶은 생각에 샛길로 빠지면, 처음의 의도는 잊고 어느새 세력(권력) 또는 잘못된 이념이 되어, 새로운 권력의 이데올로기로써 경쟁과 권력 쟁취의 도구로 변질된 결과를 마주한다. 곧 정치 영역에서 정치적 갈등 요소로 이용할 수 있는 일부가 되어 ‘쟁탈’의 목적만 남게 된다. 오늘날 구실 못하는 대부분의 우리 언론처럼 말이다.


이러한 흐름의 이유를 가장 확실하게 하나 꼽자면, 현재 우리 사회가 점차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것은 문화적, 정치적, 심리적인 모두를 망라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길복순’이 전문 킬러이면서 동시에 ‘엄마’와 ‘학부모’가 될 수 없다고 한 이유다.

완전하게 반대인 자아가 한자리에서 동시에 구현될 수도 없고, 주체성이라는 것은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NETFLIX


이렇게 한 국가가, 사회가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혼란만 가중될 뿐, 작은 문제에도 기본적인 파악뿐 아니라 아예 인식조차 어려워진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렇고, 그런 상황에서도 구성원 각자의 이기와 욕구만 앞세운다면, 결국에는 말 그대로 ‘동물의 왕국’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힘과 권력 또는 부를 거머쥔 자들의 논리와 원칙대로 모든 게 흘러가게 되고,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흐름과 프레임을 의도대로 이용하려는 세력도 있다.


(#8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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