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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May 30. 2023

그들은 기억하지만
우리는 잊어버렸다.

히바로 3/3 - 러브, 데스 + 로봇 시즌3(2022)

√ 스포일러 보통입니다만 걱정되시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목 : 러브, 데스+로봇 시즌3 중에서
   히바로(Jibaro)

크리에이터 : 팀 밀러, 데이비드 핀처
제공 :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
년도 : 2022년, 총 9화 완결
장르 : SF, 스릴러, 호러
등급 : 성인용


콩키스타도르의 침탈 행위 못지않은 일을 우리도 당한 기억이 있다.

미국인들은 5백 년 전의 부당한 침탈을 기억하고, 지금도 이렇게 작품에 담아내고 있지만, 우리는 불과 100여 년 전 일인데도 침략과 학살에 대해 사과받기는커녕 그들이 발생시킨 핵 폐기 오염수까지 억지로 마셔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


1920년대 일제는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이름만 바꿔 달고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유입된 대중문화 중에 특히 대중가요는 나라 잃은 슬픔을 애써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 많았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곧바로 이어진 분단으로 인해 그 정서는 치유되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승만으로 시작한 친일·친미적 성향의 정부수립으로부터 박정희 정권의 독재 시대와 전두환 신군부 독재를 거치면서, 짓밟혀 찢어질 대로 찢어진 시민의 삶은 ‘신파’라는 두 글자로 요약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체제로 변화한 현재에 와서는 그마저도 원형의 내부적 의미도 변화되어, 그저 ‘질질 짜는 짜증스러움’으로 남고 말았다.


치유 없이 시간만 지나갔다. 도대체 누가 그랬던가?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 먼 산을 보며 눈물 글썽이던 분들은 하나둘 생을 달리했다. 끝내 치유 없이 시간만 흘러 잊히고 지워져 버리는 것을 ‘약’이라고 하는 게 옳은 것인가?


그분들의 망향과 그리움은 일제의 국권 침탈로 시작해서 미국과 소련의 이념 대립으로 벌어진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힘없는 국가의 국민이었기 때문이고, 그 이념의 대립을 악용해 ‘반공’을 빌미로 오랜 시간 동안 독재를 일삼으며 조국 통일을 먼 우주공간으로 날려 보내버린 독재자들의 헛된 욕망 때문이다.



세계의 음원 시장에서 BTS 노래가 전 세계인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고, 우리나라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고, ‘오징어 게임’과 같은 드라마가 미국 기업이 운영하는 OTT 플랫폼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에 기뻐하고 자긍심은 느끼면서, 왜 정작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괴로움에 공감하는 건 왜 ‘질질 짜는 짜증’이 되고 마는 걸까? 아니, 어르신들은커녕 당장 주위의 소외된 이웃과 차별화하려는 노력은 해도 그분들과 이웃으로서 함께 하려는 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그렇다. 문득 생각한다. 그분들의 눈물 어린 시선을 채우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비 내리던 날, 슈퍼 앞 평상 위에 앉아있던 강아지의 시선을 채우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하물며 강아지도 어떤 기대나 희망이 있었기에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닐까? 그 여린 희망과 기대마저 무참하게 꺾어버린 것은 도대체 누구였나!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서 자주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건 사람이다. 오직 사람만이 짐승도 하지 않는 짓거리를 일삼는다.”


이 에피소드 <히바로>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인간 문명의 발전은 탐험과 도전에 있으며, 미지의 세계, 알려지지 않은 자연은 결국 인간의 도전에 하나씩 문명화되고 개발된다. 그 과정에서 미지의 존재(세이렌)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인간에게 도전한다. 그 방법은 영리하고 교묘하다.

<히바로>의 세이렌은 온갖 보석으로 자신의 온몸을 덮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법 같은 괴성으로 인간을 홀려 몰살시킨다. 인간이 현혹되기 쉬운 것들은 거의 아름다운 겉모습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교양적이고 시적이며, 예술이나 심지어 마법과도 같은 방법으로 유혹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존재일수록 독과 가시가 있음에 유념하라. 그렇지 않으면 언제 뒤꿈치를 물릴지 모르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전 정신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언제나 경쟁의 사슬 꼭대기에 서 있을 것이다. 오직 인간의 정신만이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듯한가?

인간의 탐욕으로 비롯된 침략적 만행을 개발과 도전정신으로 포장해 버렸다. 이렇듯 ‘현혹’은 자연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 <러브, 데스+로봇> 시즌3의 마지막 에피소드 <히바로>를 끝으로 길고 길었던 <러브, 데스+로봇> 시리즈에 대한 글은 이제 끝맺는다.


마지막으로 지면상 다 적어내지 못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남기련다.

마치 <마블> 영화에서 남기는 뒷얘기처럼.


먼저 ‘세이렌’은 왜 인간을 유혹해서 배를 난파시키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특별한 이유 없이 살인을 즐기는 게 그들의 목적일까? 아니면 모든 인간을 욕망과 욕구에 가득한, 근본적으로 죄악으로 인식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보일까?

그리스 신화 어디를 봐도 세이렌이 왜 사람을 유혹하고 배를 난파시키는지 그 원인과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바로>의 귀머거리 기사가 세이렌의 피가 섞인 물을 마신 후 갑자기 청력을 회복하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다.

마찬가지로 세이렌의 피가 인간 감각기능을 회복시킨다거나 새로운 능력을 생성한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 발상은 신선했지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기사의 청력이 회복되는 것은 작품에서 전하는 메시지에 매우 중요한 계기이기 때문에 그럴듯한 설명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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