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회귀 - 정치·사회편
사회는 시민들이 함께 사는 공간이다. 시민은 다양하다. 갓 태어난 아기에서부터 노령의 노인까지 가지각색이다. 구성원의 연령대와 성별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개성도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이다.
공정과 평등은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고 동등한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갈등도 필연적으로 생겨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흡연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았다. 비흡연자를 옹호하는 글은 차고 넘치기에 흡연자들 입장도 생각해 보았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범죄는 아니지만 그들은 거의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
우선 뉴스 하나를 소개한다.
「금연 확대에 이면도로 몰린 흡연자… 골목식당들 한숨」, 서울신문, 2023.06.18. 18:13, 김중래 기자
우스개 헛소리를 한마디 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이름이 ‘모’인 사람이 참 많은 것 같다. 사람 사는 곳은 강남구뿐인 것도 같고, 기자들은 대통령보다도 더 항상 경제적 타격에 걱정이 크다. 그 어떤 사건·사고가 발생해도 경제적 손실을 우선해서 쓰고, 그 뒤를 잇는 것이 늘 기대치 0인 정치다.
뉴스를 평하자는 것은 아니니 시비는 그만 걸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구역’을 지정한다는 의미는 특정 장소에서만 행해지도록 유도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금지와 규제는 폭압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 목적은 다양한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고 무엇보다 함께 상생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대책 없이 금지 구역만 계속 확장한다면 흡연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백해무익이라는 담배, 오늘날 그 해로움에 대한 인식의 확대는 상식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담배는 여전히 소매점에서 간단하게 구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범죄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들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이고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이다.
그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가능하면 사람 없는 장소로 이동한다. 흡연자들끼리 모여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에서 담배를 태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개념 없는 몇몇 흡연자도 있다. 남의 불편이야 나랑 무슨 상관이냐 하면서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 있긴 하다. 하지만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흡연자라고 해서 무작정 다 똑같지는 않다.
만일 정말로 시민들의 건강이 위협받는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이건 도시 차원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무조건 금연 구역을 확장하고, 경범죄로 몰아 과태료 처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흡연 자체는 마약과 달리 범죄도 아닐뿐더러 대부분 흡연자 자신도 흡연 자체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아, 그러면 끊으면 되지! 그러면 다 해결되는 거 아냐!”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비흡연자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피해자요, 그들은 가해자일 뿐이니까. 그들이 왜 담배를 끊지 못하고 피워대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이웃이고,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할 동등한 사람들이다. 범죄가 아닌 다음에야 개인적 선택과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문제는 공공의 피해로 귀결되는 경우인데, 이렇게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를 위해 사회적 공공 시스템이 있는 것이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공무원과 정책 및 법을 만드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다. 이제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싶으면 노래방에 가서 부르면 된다. 축구 시합을 광화문 한복판에서 한다고 생각해보라. 축구장이 있기에 사람들은 거기에 모여 축구 시합을 한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광장에서 잘못된 정책에 대한 부당함을 외치는 것, 권력을 향해 시민으로서 요구하는 시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에도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대한민국 헌법 제21조)로서 질서 유지를 위한 공공의 영역만큼이나 보장되어야 할 영역이다. 언론, 방송, 출판, 집회, 결사가 금지되거나 탄압받는 사회는 결코 민주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아무튼 노래방과 마찬가지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 즉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면 된다. 그런데 이 흡연 구역이라는 것이 주먹구구식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도심 한복판을 걷다가 담배가 피고 싶다고 걸어서 30분 이상을 걸어가야 하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담배 한 가치를 태우고 다시 돌아와야 하나? 게다가 정해진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안다고 해도 도심의 편의시설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있거나 있다고 해도 그저 장소만 제공되는 것이지 담배 연기를 처리한다거나 하는 환풍 시설조차 없다.
그 장소는 그저 사회적 격리 구역이다. 그곳에 들어선 사람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패배 의식을 느껴야 한다. 마치 학창 시절 몰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려 학생주임에게 혼나던 학생의 심정이 된다.
사람들은 지정된 흡연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공기 중으로 훨훨 날아가는 담배 연기를 보면서 이것은 그저 장소적 차별일 뿐 실제적인 해소 방법이 아닐뿐더러 인간적 존중이라고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담배 한 갑은 보통 4,500원이고 그중에 세금이 3,347원이나 되지만, 흡연자들은 그 세금 중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도움을 받고 있을까?
우리의 도시는 소수 약자를 위한 시설에 인색하다. 지하철역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만 정작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하게 되어 있다. 백화점과 같은 호화시설이 아니라도, 일반 도로의 육교 시설에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추세다. 그러나 정작 도로의 위험 지역이나 작은 골목길의 CCTV, 가로등 설치 등은 여전히 미흡하다. 경찰들은 자동차 파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주변에 CCTV가 있어도 해상도가 낮아 구별이 어려워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다른 운전자들에게 연락하여 블랙박스 화면을 찾으러 다닌다. 밤에 발생한 사고는 아예 수사 자체에 도움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수준의 방범 CCTV라면 다이소에 가서 5천 원이면 구매할 수 있는 모형 CCTV와 어떤 면에서 역할이 다른 것인가?
캐비닛 형태를 갖춘 경우도 그렇다. 아무리 흡연자라지만 그 작은 공간에 모여 담배를 피우면 폐쇄된 공간에서 어쩌라는 말인가? 너희들이 흡연했으니 너희들이 담배 연기를 모두 마시고 빨리 죽으라는 것인가?
법과 원칙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부분을 합리적으로 처리해 주고 그 합리적인 틀 안에서 위배된 부분을 제한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래야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시대가 변해 흡연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그들은 소수이고, 사회적 발언권조차 갖기 힘들다. 사회 전체의 여론이 흡연에 부정적이라고 해서 무작정 흡연 장소를 줄이거나 말도 안 되는 위치에, 말도 안 되는 시설로 정해두고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경제적 손실로 압박하기만 하는 규제 방식은 정상적인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들, 특히 자기가 담배 연기에 노출되어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야 당연히 불만을 표출하고 민원을 제기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있다.
학교에서 A라는 아이가 B라는 아이에게 맞았다고 선생님 C에게 일러바쳤다. 선생님 C가 A를 대신해서 B를 흠씬 두들겨 팬다면 그것이 합리적이고 원만한 해결책인가? 국가나 공공이 선생님 C의 역할 이상도 이하도 하지 못한다면, C의 존재 필요성은 무엇인가? 올바른 선생이라면 A도 B도 모두 똑같이 귀한 제자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법과 원칙만 강조하며 금지와 규제만 휘둘러 댈 것이 아니라, 국가는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도시, 함께 만들어 갈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방법을 찾고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 흡연자도, 비흡연자도 모두 국가와 도시를 구성하는 똑같은 사람들이고, 살인·강도와 같은 범죄가 아닌 이상에 현재의 문제는 명백한 사회 문제다.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따라 부자와 빈자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진다. 빈부 격차는 기타 모든 인간 문화적 가치들에서도 차별을 가져오고 있다. 충분한 공간과 충분한 시간, 여가, 환경을 갖춘 사람들만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고 가난하고 힘없고 소수의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가? 이제 불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마저 외치기 시작한 절망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그들을 위한 사회 복지도 공공의 영역에서 책임감 있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빈부 격차를 뭐 이런 문제에까지 끌고 와 엮느냐고 생각하는가? 생각해보라. 만일 시골의 한 농촌 마을이었다면, 아니 평화로운 시골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강북의 비교적 가난한 어느 동네였다면 흡연 문제가 뉴스에 내걸릴 만큼의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을까?
모두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도시로 모이도록 구조화해놓고 모인 사람들의 다양함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규제하면서 ‘지킬 놈은 남고 싫은 놈은 퇴출이다’ 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캐비닛 형태로 만들되 공기 정화 후 외부로 담배 연기가 빠르게 배출되는 공간이라면 어떨까? 그런 시설이라면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도 피해가 거의 없을 것이다. 사회적 비용? 핵폐수도 정화한다는 시대에 그깟 담배 연기 정화 시설에 그렇게 많은 세금이 들까? 설사 세금이 든다고 해도 사회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만 있다면 도심 한복판에 시설을 갖추는 것이 좋은 게 아닐까?
백화점, 큰 빌딩, 대형마트, 극장 등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설에 화장실처럼 하나씩 있다면, 내지는 그런 상업시설에 의무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로 지정한다면 어떨까? 흡연자들도 비흡연자 못지않은 소비를 똑같이 하고 있으니 투자 차원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앞서 말한 정치적 기대치 0이라는 표현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정권은 그런 사회적 비용을 감수하느니 그냥 흡연하는 사람들을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하여 밀어내는 것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론을 등에 업고 조치하기에 더 쉬운 방법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파업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나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진 이태원 유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고, 기대치 0을 넘어 절망하게 만든다.
그들이 ‘귀족노조’, ‘시체팔이’ 같은 희귀한 용어나 만들어 내서 여론 형성과 프레임 짜기로 밀어붙이는 편이 쉽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다 잊고 오직 내 밥그릇 걱정만 해야 하는 경쟁의 아비규환에서 허우적거리는 개·돼지에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이 곧 정치적 입장과 빈부의 진영으로 나뉘어 새로운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가져오는 씨앗이고, 악순환 고리의 연결점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너무 과도한 문제 제기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