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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Jun 15. 2023

변화에 대한 단상

일상으로의 회귀 – 생활·문화편 : <골때리는 그녀들>

<골때리는 그녀들> 제97화. 구척장신 대 FC불나방의 경기. 어느덧 방송 횟수가 100회를 바라보고 있다.


시합을 치르기 위해 두 팀은 여느 때처럼 구장에 길게 줄지어 섰다. 2023년 6월 14일에 방송된 슈퍼리그 3·4위전 경기다.


구척장신 선수들은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이기겠다는 결연한 마음이 얼굴에서 묻어났다. 반면 불나방 선수들은 하나 같이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경기의 승패는 이미 예상되었다. 더 나아가서 보면 <골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느꼈던 재미와 감동도 ‘이제는 수명을 다 했구나’ 하는 허망함도 느껴졌다. 이 경기만 아니라 최근에 보았던 몇몇 경기를 보면서 내내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 경기는 <골때리는 그녀들>이라는 방송을 있게 만든 주인공인 박선영의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다.


<골때리는 그녀들>은 <불타는 청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다. 재미 삼아하던 출연진과 스텝들 사이의 내기 경기로 시작되었던 여자 풋살이 2021년 설날 특집 방송으로 방송되고, 이에 대한 호응이 좋으니까 아예 정규 편성되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돌아오겠다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고 <불타는 청춘>은 흐지부지 사라졌다.


[참고 글]


내기에서 이기면 원하는 음식을 얻을 수 있었기에 승리가 간절한 경기였지만, 축구라고는 해본 적 없는 여성들이 넘어지고 헛발질하면서 함께 뒹굴며 이루어 낸 성취감과 땀 흘리는 즐거움을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 출연진뿐 아니라 스템들까지 전체가 하나의 가족과 같이 즐거운 프로그램이었다.


‘미혼이나 이혼한 중년 이상의 연예인’이라는 조건 때문에 출연자 섭외가 점차 어려워졌고, 출연한다고 해도 해피엔딩보다는 슬프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흐르기 쉬웠다. 즐거운 예능을 표방했지만 가끔 다큐멘터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담당 PD는 살리는 카드와 버리는 카드를 선택했다.


그렇게 시작된 <골때리는 그녀들>.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국가대표 감독들이 대거 참여하여 각 팀을 지휘하면서, 전술과 노련미가 늘어났으며, 젊은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각 팀은 점점 더 강해졌다. 순위가 있으니 마냥 웃으면서 경기를 치를 수만도 없다. 경쟁 시스템이 도입되고 급기야 리그 퇴출이라는 카드가 등장했다. 어느새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해버린 것이다.


무슨 국가대표 선발전도 아니고 K리그도 아닌데 그녀들의 열정보다 승패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패배한 선수들의 눈물 흘리는 모습과 독기 품은 눈빛이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이기고야 말겠다. 이겨야 한다!’라고 어금니를 깨무는 그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왜 이기겠다고 다짐하는 것일까? 지는 것보다 이기면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졌다고 펑펑 울어야 할 만큼 억울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카메라를 통해 전국으로 방송되는 탓이 크다고 본다. 패배가 마치 무능처럼 비치는 것이 연예인으로서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들은 전문 선수가 아니다. 방송도 스포츠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중점을 둬야 했을까?


함께 부딪고 구르며 땀 흘리는 즐거움은 점차 사라지고 경쟁과 승패에 대한 인식만이 남았다. 선수들은 심하게 다치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좀 있는 출연자들은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혀를 내두르며 퇴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많은 인원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락날락하면서 애정을 보내던 시청자들은 멘붕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현상이 이어지다가 결국 오늘 경기에서는 일명 ‘절대자’로 불리던 70년생 개띠 박선영이 스스로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말한 자기의 마지막 경기에서 마지막 몇 분을 경기장 밖에서 아픈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동년배인 조혜련은 관중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한여름이건만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나 느낄 수 있는 씁쓸하고 냉랭한 찬바람이 느껴졌을지 모른다.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남는 스포츠 경기가 대중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상품화된 감동, 소비되는 열정은 너무 과잉된 채널들 틈에서 그저 생존을 위한 발버둥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축제로 시작한 경기는 어느새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권력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생존 게임으로 변질된 것이다. 21세기에 문화상품이라는 예쁜 포장으로 치장되어 있을 뿐, 모든 추세는 선정성 아니면 폭력적인 자극만이 상품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직업과 시스템도 같은 방식이다. 그 처음을 따라 올라가 보면, 처음에는 신선하다. 함께 웃고 즐겁기 위해, 희망을 품고 시작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받아들인다. 그 ‘필요’가 누구에게, 왜 필요한지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 하니까 입 닥치고 따라가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기득권이 생겨나고, 기득권은 자기 이익과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서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 성적을 기준으로 순위를 정한다. 그 층위가 깊을수록 자기에게 다가올 새로움과 저항은 멀어지게 마련이니까. 기득권이 상대할 세력이란 자기가 마음대로 다루기 쉬운 알랑거리는 몇몇만 상대하면 그만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경쟁 시스템에 밀어 넣어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료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점점 익숙해진다. 점차 그것은 당연한 당위가 되는 것이다. 을과 을끼리 박 터지는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패배자는 사회에서든 조직에서든 퇴출뿐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패자부활전이란 없다. 그냥 철저하게 버려지고 잊힌다. 정말 두려운 것은 그것이고, 그 두려움은 적절하게 이용하는 자들에게 힘이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런 흐름이 사회 전체의 당연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각 개인은 이기적으로 변한 자신을 알지 못하며, 승자 찬양에 몰두하며, 버려지고 소외된 사람들을 심지어 적대시하게 된다는 데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정치·노동·교육·문화 등 거의 모든 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권력과 자본의 거시적이고 계획적인 의도와 방향대로 지배되고 있고, 말 그대로 ‘알아서 기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태어나 생생하고 꾸밈없는 모습에서 점차 사회·문화적 관습에 물들며 세련미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차가운 금속 면처럼 깔끔하긴 하지만 생명력 없는 쟁탈(爭奪)만이 남아버린 세계가 되었다. 그것이 마치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미래처럼 포장되었고, 그 안에서 사람은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윤리적·도덕적 가치보다 돈과 스펙으로 꾸며진 상품적 가치로만 평가된다.


이대로라면 미래 세계에 사람의 설 자리는 없다. 인간 흉내를 내는 인형들만이 가득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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