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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Aug 09. 2023

쓰라길래 쓴다만…

일상으로의 회귀

문자가 왔다.

오랜 시간 브런치를 떠나 있었더니, 브런치에서 문자가 왔다.

뭐, 사실 처음 받아보는 건 아니다. 몇 번 받아봤다. 그런데, 글 쓰기 싫어서 안 쓰는 게 아니라 쓸 수가 없어서 못 쓰는 사람에게 이런 문자는 부담이다. 공개적으로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쓰는 것도 싫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다.


글쓰기가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는 문자였다. 가끔 읽어보는 ‘글쓰기 코칭 베스트셀러’에서 한결같이 하는 말처럼.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건지, 쓰고 싶어서 글을 쓰는 건지 헛갈린다.


글쓰기가 운동과 같다면 나는 심각하다. 숨쉬기 운동을 빼면 운동이라는 걸 하지 않은지 거의 1년도 넘은 것 같은데… 운동도 좋고, 글쓰기도 좋지만, 사람이 심리적으로 운동도 하고 싶지 않고, 글도 쓰고 싶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나? 텅 빈 마음으로 별 의미 없는 빈말만 가득 하려거든 그냥 담배만 뽀득뽀득 피워대는 게 더 나을 듯도 한데…


나는 글쓰기가 운동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사는 거다. 싫어도 좋아도 무조건 살아야 하는 것. 어떤 조건이나, 환경 또는 처지에 그대로 노출되어, 특히 자기 자신에게 혹독한 욕설을 내뱉어가며 마주해야만 하는… 민낯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글은 더욱 그냥 툭 내뱉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 타인들은 몰라도 내게 너무 부끄럽고 파렴치한 짓이다. 게다가 기록으로 남아, 차후에 어느 날인가 문득 열어봤을 때 하염없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걸 내가 썼어? 헐!” 하면서 경악하는 일도 이젠 놀랍지 않을 만큼 충분한 잘못을 반복했다.


만일 브런치에서 글 쓰시는 분들이 모두 나와 비슷하다면 브런치는 아마 운영이 힘들지 모른다. 많은 글이 있어야 읽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에. 결국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은 같은 사람들이고, 모두가 플랫폼에 접속하는 방문자다. 이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 비슷해야 브런치 서비스에 대한 운영뿐 아니라 이미지도 명확해질 것이므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상업성을 갖는 인터넷 플랫폼에 큰 기대는 없다. 결국 플랫폼 서비스 전체가 결국 하나의 상업적인 상품이니까, 그저 창작이란 형태로 소비하는 새로운 형태일 뿐.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람들에게 인지도와 운용이라는 양쪽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기계적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글 쓰는 일이 누군가에게 알려져야만 하고, 돈이 돼야만 한다는 현실이 슬프다. 상품 진열장 제일 앞칸에 자기 글을 상품으로 올려놓기 위해 고민하면서 철야 근무 중인 기획실 직원들 같다.


자기가 쓴 글로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흐름마저 바꾼다는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시대적 편승에 따르는 흐름을 좇느라 바쁘다. 무엇을 덮고 무엇을 부각해서 어떤 부분을 변명하고 어떻게 변호하는 글을 써야 할지, 어느 분 말대로 ‘참… 알아서 잘들 긴다.’ 그래도 부끄러움 한 점 없이 잘났다고들 한다.

그들에게 글쓰기란 내면의 양심에게 허락받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치켜들어 보일 어깨 뽕을 만드는 일이 되었다. 칼럼이고 기사고, 지붕에서 줄줄 새는 빗물처럼 마구 쏟아지는 뉴스와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지는 신작 책들도 그렇다. 물론 쓰고 싶어서, 꼭 써야만 해서 쓴 글도 있지만 쓰라고 해서 또는 먹고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쓴 글이 많다.


사회의 분열은 현실이 아니라 글감일 뿐이고, 누가 뭘 잘못했는지 찾아내 우르르 몰려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일삼는다. 불안을 설명하며 불안을 키우고, 범죄를 홍보하며 즐거워한다. 오직 처벌에 목을 맨 사람들처럼 밑바닥의 저변은 관심도 없이 그저 처벌과 법 집행만 외친다. 사형제를 부활하라는 둥, 공권력을 확대하라는 둥.


사건과 사고를 인식하기도 전에 다른 이슈가 해일처럼 달려든다. 불안한 상태에서 걱정하다 보면 벌써 하루가 지났다. 내일은 어떻게 살지? 한숨 내쉬다 보면 늙어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이야기는 정치적 대립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모두가 아니라고 외면하지만 이미 일상 내부 깊숙이 자리했다. 사람들은 때로는 숫자로 표기되는 성과, 지지율, 청취율, 시청률, 판매 부수 등으로 표현되고, 중립이란 말은 어느새 말도 안 되는 권력 편승의 표준어가 되었다. 내년이면 지지율이라는 숫자는 투표율과 득표율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 얼마나 헛된 것이냐! 득표율이 최선의 확실한 선택이라면 지금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나?


맞다. 글 쓸 맛이 안 난다. 입맛이 떨어져 음식이 맛이 없는 것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를 쓰고자 했지만, 그러면서도 이왕이면 희망과 기대, 밝음 같은 걸 쓰고 싶었다. 그러기엔 현실은 너무 거지 같다.


며칠이 멀다 하고 사고로, 폭력으로, 자살로, 전염병으로, 이젠 더위까지… 생명이 죽어간다. 목숨이 사그라진다. 안타까운 죽음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결과까지도 다시 정치적 갈등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차별과 처벌’이라는 뙤약볕으로, 폭우로, 칼날처럼 내려 꽂히며 반복하고 있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가 국가냐?” 하고 따지면 명예훼손이란다. “그따위로 하려거든 내려와!” 했더니 ‘어딜 감히!’라고 호통친다. 21세기, 국민에 의해 주어진 권력을 조선시대 왕쯤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쪽팔리고도 남은 명예가 있었나? 진정한 ‘명예’에 대해 기록으로 남긴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승에서 배꼽을 잡고 뒤로 자빠질 코미디다.


박근혜 시절에도 이보다 암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치가 엉망이니 사회 전반적으로 불안하다. 노동 현장은 노동자와 고용자 사이에 전쟁이고, 상사와 부하직원은 적이 되었다. 존경과 자애로 친근했던 선생님과 학생들도 이제 법에 의존하며 적으로 돌아섰고, 그 개개인은 우울과 불안으로 목숨을 끊는다. 가정사나 개인사가 인터넷에 떠돌고 마녀사냥으로 시작해 사회적 타살을 불러온다. 북한은 북한대로 미사일을 계속 쏴대고 거기에 맞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협박으로 대응한다.


불안과 공포는 결국 흉기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형태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불안 요소는 사회 곳곳에서 현실화하는데, 그곳에 장갑차와 경찰 특공대만 가득하다. 이런 모든 현상을 심층적으로 찾아내 밝혀야 할 방송과 언론도 자체 생존을 위해 전쟁 중이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핵 오염수 해양투기 문제를 대다수 국민 반대를 무릅쓰고 방조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와중에도 부동산 사기, 주가 조작, 이권 챙기기 등 이기적인 행태는 활개를 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승승장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은 끊임없이 피와 살을 빨리며 하수구 맨홀로 흘러 내려간다.


폭동? 테러?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지 하는 의문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과연 사회 불안이 해결될 수 있을까?


초등학교 교사가 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도 모르고, 묻지도 않으면서 학생들과 선생님 사이를 적처럼 규정해 무슨 학생 인권법이 문제라는 둥, 교권이 문제라는 둥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법이 무기가 되고 권력이 된 현재, 법에 유리하면 법을 불러 외칠 것이고, 처벌이 빠르고 편한 방법이라면 누구든,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희생양을 찾아 빠르게 덮고 가는 방법을 찾을 것이 뻔한데, 권력을 가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하나같이 누리고자 하는 세상에서 국민은? 시민은? 서민은? 특히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은 누구를 믿고 어디에 기대야 하나?


누구를 위해서 거리에 장갑차를 깔았나? 권력자들을 위한 보여주기 퍼포먼스는 아니고? 무엇을 위해서? 설마 공권력과 힘으로 상징되는 것들로 사회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다!


이번 잼버리 대회 개영식 때,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VIP를 위해 도열하고 긴 대기시간 동안 폭염에 쓰러져 간 어린 학생들의 모습과 우리나라 국민은 무엇이 다를까?


아, 다르다면 그들은 퇴영할 수 있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으며, 차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이익을 되돌려 줄 수도 있겠다.


우리 국민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불안해서 호신용품이 동나도록 사야 하고, 찔끔 올린 임금보다 몇 배는 더 오른 물가에 전기료가 겁나 에어컨도 가동하지 못하며 더위를 견뎌내야 한다. 특히 공공요금 면에서도 사회적인 불안감 이상으로 불안에 떨고 있다. 그 분노의 한계는 자기보다 더 약한 누군가를 찾아 분노를 표출하면서 살아내기에 이르렀다. 증기로 꽉 찬 압력밥솥에 계속해서 증기만 발생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찌 될까!


왜 이렇게 되었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 우리 국민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진영 싸움? 좌우? 웃기는 소리다. 진영, 그런 거 없다.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프레임일 뿐. 일반 국민은 진영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도 관심 없다. 왜냐고? 당장 먹고살기 힘들고 불안하고 무서워 죽게 생겼는데 무슨!


편 가르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싸우고 아옹다옹하는 건 상관할 바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대한민국의 주인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해야 할 주체인 것이다.


권력이란 사회가 불안할수록 자신의 입지가 강해지는 법, 불안과 사고와 불만은 늘고, 힘과 폭력으로 충분히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렴치한 군상들은 그 안에서 특혜와 이권을 먹고 산다.


나는 ‘묻지 마’를 믿지 않는다.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이유’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유와 원인을 파악하지 않거나 파악하고 싶지 않거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무작정 빨리 대충 덮고 지나가려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더 커다란 폭발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안타까운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 아무런 가치 없이 숭고한 생명을 또다시 바쳐야 할 것이다.


일본이 주변 여러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자신들의 오물을 바다에 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처럼. 끝끝내 반성이나 성찰보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덮고, 파묻기만 하려 한다면 그것은 분명 언젠가, 어느 때고 반드시 표면으로 강력하게 튀어 오르며 반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 이상 기후, 열대야, 태풍, 폭우 등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입추(立秋)인가! 2023년도 벌써 가을인가?


글쓰기는 운동과 같다고 한다. 하루라도 안 쓰면 근육이 약해지나 보다. 분노만 씹어 뱉어 놓은 꼴이다. 존경할 수 없는 어른에게 ‘제발 존경 좀 해라’ 한다고 존경심이 생기나? 별 관심 없는 이성에게 ‘제발 사랑 좀 해달라’고 한다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린 무조건 행복해!’ 외친다고 행복해지나?


현재 시점에서 인공지능의 인기가 치솟는 데는 바로 이런 지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걔네는 슬픔이나 분노나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으니, 언제라도 ‘즐거운 글 좀 써봐’ 하면 턱 내놓겠지. 행복을 모르는 존재가 행복을 말하고, 진실을 모르는 존재들이 진실을 떠든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세상이 아닌가? 지금의 몇몇 인간은 그 편이 매우 편리하고 좋게 느껴질 것이다. 돈만 내면 뭐든 척척 해주는 세상이 열린다니 그보다 좋은 세상은 없지 않은가!


언젠가 어느 연예인이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춤추며 노래 불러야 했다는 직업적인 고단함을 들었을 때, 방금 남편에게 이혼당한 여성이 텔레마케터 상담에서 ‘아유~ 그러셨군요. 힘드셨겠어요. 고객님’ 하며 오히려 타인을 위로해야 할 때, 타국도 아닌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던 자식이 바닷속에 싸늘하게 누워 있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을 때, 축제에 그저 놀러 갔던 자식이 갑자기 숨도 못 쉬고 압사당해 죽었다고 전해 들었을 때, 사회와 정치는 지겨우니까 빨리 잊어버리자고 말하기도 하고, 징글징글한 과거는 다 잊고 오직 정해지지도 않은 미래만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바치자고 말하며, 그마저도 정치적인 대립에 휘말려 상처를 후벼 파고 다시 후벼 파고 또 후벼 파는 짓을 몇 번을 반복해도… 왜? 왜 변하지 않는 걸까? 도대체… 왜?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그 분노! 그 잘못된 부조리를 써! 그러면 되잖아!” 그렇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둠이고, 우울하고, 퇴색된 글이다. 내가 화가라면 온통 검은색으로 칠 한, 또는 회색으로 가득한 그림을 맞이하며 스스로 ‘이러고도 내가 화가냐!’ 하고 절망하는 심정과 비슷하다.


물론 나는 등단은커녕 정식 작가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쓰는 글이라고는, 가끔 내가 읽어봐도 유치하고 우스운 글뿐이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까지 부끄러운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내가 만족스러우면 그저 ‘음… 잘 썼어! 좋아!’ 하면서 흐뭇할지언정, ‘야! 이게 도대체 뭐냐? 뭐가 맨날 그렇게 죽겠냐? 뭐가 맨날 그렇게 힘들어? 너만 힘드냐?’ 하면서 술과 담배만 불러들이는 글, 싫다. 게다가 세상이 거꾸로 가다 보니 자칫 잘못 분노를 표현했다간 ‘잡혀갈 것 같다.’


내게 남은 건 이제 이 보잘것없는 글쓰기뿐이다. 이것만이라도 솔직하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쓰라고 해서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어 쓰고 싶다. 쓰지 말라고 말려도 쓰고 싶을 때 쓰고 싶다. 돈벌이가 된다고 해서도 쓰고 싶지 않다. 조회수 올리려고도 쓰고 싶지 않다.


진정… 그저… 나를 위해 쓰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 희망과 소망을 위해.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그런 글을 쓰고 싶을 때, 그때 비로소 꼭 쓰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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