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지막 네오 Aug 15. 2023

되새기는 광복의 의미

일상으로의 회귀

광복절(光復節)은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제정된 기념일이다. 그 정의는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늘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윤석열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 그럴듯한 단어의 나열을 통해 혼란스럽게 정립되지 못한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8.15 광복의 의미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탈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날’을 의미한다. 광복 이후에 벌어진 한국전쟁과는 별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광복은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며, 일제의 탄압과 폭거에서 벗어난 ‘자유’를 말한다. 한 국가로서, 국민으로서, 온전한 사회와 개인으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러한 의미의 독립운동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침탈하고 빼앗았던 것은 일본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갑자기 공산 세력에 맞서 자유 국가를 건국하는 과정과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과정으로 연결하며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맞는 반은 ‘독립운동이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맞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첫 정부수립에서부터 잔재한 친일 세력에 의해 교란되어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들의 활동으로 친일 잔재를 확실하게 뿌리 뽑지 못했고,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 사회의 온갖 혼란과 대립, 갈등의 씨앗 아래에는 늘 친일 세력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틀린 반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광복으로 쟁취한 ‘자유’는 대한민국이라는 독립운동가와 국민이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고 피 흘려 얻은 ‘자유’이지 이후에 이어지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냉전적 대립에서 말하는 진영의 ‘자유’와는 다른 것이다.


이런 혼돈의 쓰임새는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시대적 사명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 국가들이 연대하여 자유와 인권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고, 세계시민의 자유와 평화, 번영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 부분에서도, 먼저 ‘보편적 가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것을 공유한 국가들의 연대에서 가리키는 국가는 현재 미국과 일본을 말한다. 일본은 광복절에 적으로 언급해야 할 원흉이며, 미국 역시 냉전에 따른 손익을 계산하여 움직였을 뿐 정작 우리나라가 반으로 갈라지게 만든 장본인이다. 역사적 사실들을 보건대, 어떠한 사과나 반성은커녕 지금도 위협을 가하고 있는 일본과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피를 빠는 미국과 같은 국가들에 대해 철저하게 계산된 형식으로 접근하는 외교 형태는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 공유할 공통의 보편적 가치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진영 논리로 갈라서 이념적 논쟁을 부추기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 국민에게 우리의 독립운동과 광복의 의미에 혼란스럽게 덧칠하여, 마치 우리의 독립운동이 추구하고자 한 것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것처럼 변질시킨다. 815 광복의 대상은 분명하게 침략자 일본에 대한 것이다. 억지로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를 끌어와 여기에 이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연대’를 통한 세계 평화와 번영은 분명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다. 그러나 ‘연대’는 동등한 입장에서 가능한 것이다. 종속적인 힘의 논리에 눌려 대다수 국민과 지난 역사적 사실까지 바꿔가며 이익을 좇는 건 연대가 아니라 ‘굴욕’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지키고 경제적 토대를 위해 땀 흘린 산업 역군과 지도자들은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결코 광복 이후에 또는 해방 이후에 경제적 이득을 취한 자들이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는 없다. ‘경제’를 ‘자유’와 연관 지어 현실적 언어로 편승시키려는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가당치 않은 억지에 불과하다.


경제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의 한계는 이미 현실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국가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낙수효과는 실제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세계의 자유 경제체제에서 경제적 강대국이 흔들리면 나머지도 크게 영향을 받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은 자국의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를 시장으로 만들고 경제적 약소국의 노동력과 경제적 이익을 약탈하고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한다. 현대는 이미 물리적인 무기 억제력보다 경제적 억제력이 더 강력한 침략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우리 정부는 이런 새로운 세계적 패러다임에서 자국민의 행복보다 다른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고 있는 것만 같다. ‘보편적 가치’는 우선 우리나라 국민의 보편성과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또는 권력관계가 우선시되는 경우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에서, ‘독립’에서 물타기 해온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는 느닷없이 다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로 매몰되고, 그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과거와 상관없이 일본을 이웃으로 인정하고, 미래를 함께할 동반자라고 공언하고 있다.


한일관계에서의 ‘보편적 가치’는 무엇인가? 양국의 평화와 협력은 적어도 동등한 상태에서 가능한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사과와 반성 없이 다시 군국주의적 패권을 쥐고자 눈치를 살피는 가해자와 40여 년의 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리고 핍박당한 피해자가 아무런 합의나 이해 없이, 어떻게 협력이 가능한가? 그들은 진정한 협력이나 연대를 생각하지 않는데, 왜 피해자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 거기 어느 지점에서 양 국민이 이해할만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걸까?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말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립과 갈등을 끌어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갈등과 대립 상황이어야 한다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당연히 우리나라 국민이어야 한다. 구태적인 이념 대립을 엉뚱한데 갖다 붙여 불안을 조성하고, 사회적 갈등으로 분열하게 만들고, 그 내부에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분립되어 있는 권력 체계를 흔드는 것이야말로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다는 ‘내부의 적’이 하는 행태일 것이다.


사회, 정치, 경제, 안보, 외교 등 무엇 하나 제대로 안정되는 것 없는 상황에서 문화, 복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약속은 공허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기후변화와 전염병, 바이러스 창궐 등도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과 첨단과학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파괴로부터 왔다.


대통령은 신이 아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고 무엇이든 그대로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거기에다가 지켜지지 않거나 엉뚱한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뿐이다. 속임수와 거짓으로 연명하는 권력은 수많은 희생을 불러오고, 옳지 못한 생각과 정책은 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로 되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무거운 직을 맡은 지도자는 거기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 힘과 권력으로 억눌러 국민을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로 만들지 말고, 비난과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 강자에게 조아리고 약자에게 휘두르지 말라.

국민 없는 왕은 왕이 아니다. 시민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걸 기리는 날. 오히려 나라를 빼앗아 간 이들을 향해 이웃이라고 칭하는 대통령의 말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

현시점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 그 중추에 핵무기가 걸려 있는 것이라면, 핵보유국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핵을 보유하지 않으면 해결될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핵확산방지조약(NPT)마저 그 세부적 내용을 살펴보면 이미 핵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선점한 강대국들에 의해서 다른 국가들이 핵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목적을 위한 조약임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평화를 위장한 힘의 논리에 따른 위계일 뿐인 것이다.


자유, 인권, 평화, 법치, 보편적 가치… 같은 단어라도 다르게 이해하는 수준이 되고 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근본적인 합일과 조화의 방향보다 시장경제 논리에 따른 차별, 처벌을 앞세운 법치, 불공정한 공정, 책임지지 않는 권력의 끝은 너무나 뻔하다.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공권력으로 억눌러서 될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테러’가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의 곪은 부분이 터지기 시작하는 징조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를 외치며 아직 독립되지 않은 나라이기에, 또는 언론을 포함한 매체들처럼 알아서 기면서 자기 검열을 해야 하기에, 나 또한 ‘자기 검열’ 차원에서 변명 같은 말을 쓰자면,


지금까지 써 내린 이 글은 순전히 ‘자유 국가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어느 진영이나 정치적 편향성 없이, 순수하게 나라와 국민, 나아가 인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생각한 바를 가감 없이 썼을 뿐이다. 누구 힘 있고 높은 사람에 대한 혐오나 지탄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님을 밝히며, 같잖은 명예 따위 훼손하려는 의도 같은 생각은 절대 없다.


2023년 8월 15일 광복절 날. 왠지 분노가 치밀어 냉정해져 보려고, 나를 향해 쓴 글일 뿐이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쓰라길래 쓴다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