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지막 네오 Oct 18. 2023

이태원 클라쓰 #1/4

모두가 다 알지만 우린 외면한다

<이태원 클라쓰 정보>

편성 : JTBC 2020.01.31.~2020.03.21., 16부작
제작사 : 쇼박스
연출 : 김성윤, 강민구
원작 & 극본 : 조광진

등장인물
박새로이(박서준), 조이서(김다미), 장대희(유재명), 오수아(권나라),
장근수(김동희), 장근원(안보현), 강민정(김혜은)
최승권(류경수), 마현이(이주영), 이호진(이다윗), 김토니(크리스 라이언),
박성열(손현주), 오병헌 형사(윤경호), 조정민(이서 엄마, 김여진), 김희훈(원현준), 오혜원(최유리)
<간단 줄거리>
아직 어린 고등학생 시절. 박새로이는 불합리한 짓을 못 참아 내지른 주먹 한 방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것을 잃는다.
세상은 힘없이 약한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방식대로 흘러간다.
긴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성장하는 박새로이는 묵묵히 한 걸음씩 자신이 생각했던 꿈과 복수를 향해 나아간다.
그 배경은 이태원 거리, 새로이는 꿈도 이루고, 복수도 성공하고, 사랑까지 쟁취할 수 있을까?


01. 모두가 다 알지만 우린 외면한다


사람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 안다. 문제는 그 정의라는 것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헤맨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대부분 뚜렷하지 않다. 왜냐하면 뚜렷하지 않아야 진리이기 때문이다.


웃기는 소리라고? 아니다. 진리가 뚜렷하지 않은 것은 진리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시력이 뚜렷하지 않은 것인데, 사람들 대부분은 진리가 뚜렷하지 않다고 한다. 진리는 우리가 생겨나기 전부터 뚜렷했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정의가 무엇인지 이미 안다.


드라마나 영화가 하는 일은 정의에 멋을 덧씌우는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애초에 처음 태생부터가 완전한 예술의 생김새로 탄생하지 않았고, 재미를 덧입은 채 태어났고 유지됐으며 지금에 왔다.


영화나 드라마가 멋을 덧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이제 상상하기에도 끔찍하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나쁜 얘기라서 지겨운 것이 아니듯이, 삶이란 너무 메마른 어떤 정의(定義)로 그 안에 정의(正義)를 몰아세워 왔다.


정의라는 것은 멋진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일이나 그렇듯이 사람의 삶에서 정의를 지켜낸다는 것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리고 그 장·단점은 사실 같은 의미로 애매하게 보일 수도 있다.


먼저 장점은 사람들에게 정의가 멋스럽고 판타스틱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지 않고 꾸며지고 그럴듯한 진리를 원한다. 그렇기에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정의란 전혀 멋있지 않다.


현실 세계의 진리는 메마른 감정처럼 차디차고 논리적으로 자리한다. 물론 멋있는 정의도 종종 있기는 하나 대부분의 정의 실현은 전혀 멋과는 거리가 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 사이에 있어 정의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할 만한 것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단점은 정의의 의미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멋이든 뭐든 취하기 시작하면 처음의 멋도, 정의도 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허무와 허세가 된다. 즉, 정의와는 반대편에 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정의라고 믿었던 것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닐 수도 있다는 현실. 문제는 그 상황에까지 이르는 데 있어 그 자신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 그것을 안다는 말과 뚜렷하지 않아 애매하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알면서도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부정하고 회피하는 것도 습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어느 작가가 말한 1만 시간의 반복처럼,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박새로이가 말하는 ‘단 한번’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딱 한번’을 허용하면, 그 순간 그것은 내면에 들어앉아 나 자신을 잠식한다.


어느 상황이 되었든, 어떤 이유가 되었든 오직 인간만이 가끔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간다. 게다가 그 이유나 원인까지도 사실은… 안다. 무서운 사실은 바로 그 점이다. 어쩌면 성악설은 이런 바탕을 근거로 해서 완성된 이론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이 안다는 것은 여지가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세상에서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반성하고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감옥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을 감옥에 넣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친다면 더 힘들 것이다. 때때로 세상은 그 이후에도 진정한 반성의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몇 안 되는 예외의 경우일 뿐, 보통은 원 스트라이크 아웃이다. 매몰차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삼세판이 없다. 삼세판을 요청하는 자체가 이미 진 것이고, 그것은 상대에게 진 것이 아니라 비굴한 자기 영혼에게 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복수’에 대한 색다른 개념을 보여준다. 이전에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는 그렇게 말했다. “복수하고 싶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되어라”라고. 그런데 더 나은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회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은 개인과 사회라는 틈바구니에서 주관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에 휘둘려 정신질환 증세를 겪을 정도로 어렵다.


주인공 박새로이는 아직 어린 고등학생 시절, 사회적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박새로이의 편에 서서 그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사도, 법도, 친한 친구도 모두가 적당한 이기심과 흐름에 몸을 맡기며 억울한 그를 방치한다.


나는 항상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아! 이건 지극히 드라마일 뿐이다. 이건 영화일 뿐이다. 현실은 이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상상한다. 박새로이가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생겼을 때, 오병헌 형사가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 했다면 어땠을까? 오수아가 박새로이 곁을 지켰다면 어땠을까? 내 지인은 그런 말을 하면 대뜸 그런다. “야! 그러면 드라마가 재미가 없잖아!”

음… 그래, 아마 그래서 나는 훌륭한 소설가가 못 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처음 시작한 말로 돌아가 보면,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 자유도 무엇인지 안다. 평등, 공정 등등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사회는 그런 가치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악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걸까?


이 작품은 원작 웹툰을 보지 못했다. 다만 웹툰도 드라마도 대박이 나면서 원작자인 조광진이 드라마의 극본 작업에도 참여했다는 것을 보면서, 그가 말하는 ‘힙’한 색깔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생각은 해봤다. 그 부분을 앞서 말한 ‘멋’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일단 재미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그 내부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되는 주제 의식이 고리타분한 것이라면 사건과 구성으로 꾸며가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밥 먹여주랴, 일단 상품성에서 성공해야 그다음에 예술이고 나발이고 찾을 수 있게 된다. 만화가 되었든, 시나리오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우리 글 쓰는 작가들의 현실이 안쓰러운 부분이다.


뭐, 어쨌든 그래서 현실과 영화나 드라마의 이야기는 항상 엇갈린다. 우리는 누구나 정의를 알고 있지만, 그 정의는 언젠가부터 상품성 있는 또는 충분히 자극적인 영상 안에서만 만들어진 정의이다. 마지막 화를 보면서 통쾌했던 마음, 극장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느끼는 통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저녁거리로 나서면 씁쓸하고 쓸쓸해진다.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생각한다. ‘왜 당연한 것을 두고 괴로울까? 모두가 다 아는 진리가 왜 세상에는 없는 걸까?’ 젠장… 이러다가 머리카락 다 빠질라.


(#2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해 우리는 #6/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