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지막 네오 Oct 19. 2023

이태원 클라쓰 #2/4

사회 속 나와 개인의 나

02. 사회 속 나와 개인의 나


드라마는 보통 제1화가 가장 중요하다. 다른 중간은 듬성듬성 보더라도 이후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이어 갈 수 있는 반면에 첫 화는 건너뛰면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원작자가 자신의 이름을 인장처럼 사용한 광진고등학교로 전학 온 박새로이는 첫날부터 이호진을 괴롭히는 장근원을 참지 못한다. 거대한 사건의 근원은 장근원의 잘못된 행동이었고, 장근원의 인간성은 장대희라는 괴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유 없는 무덤 없듯이, 원인 없는 불의 또한 없는 법이고, 손가락 말고 달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는 생김 자체부터 매우 어려운 말이다. 한 사람의 개인을 나타내는 ‘人’ 자에서부터 이미 혼자서는 설 수 없고, 서로 기대어 의지해야만 하는 글자로 인간 존재를 설명한다. 뒤에 따라오는 ‘間’은 그 ‘사이’ 즉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얘기할 때면, 시인 정현종 님의 시 ‘섬’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개인은 태어나기 전부터 혼자인 적이 없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이미 엄마와 함께이고,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며 사회에 던져진다. 눈도 뜨기 전에 타인의 손길에 따라 비자발적 관계는 시작된다. 그래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혼자인 사람’과 ‘혼자인 사람’ 사이에 놓인 섬에 가고 싶은 까닭은 무엇일까.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도 다른 좋은 작품들처럼 ‘인간’에 내포된 ‘개인’과 ‘관계’를 잘 살려냈다.

캐릭터 각 개인은 ‘소신’과 ‘고집’, ‘자존심’과 ‘오만’ 등을 부각하여, 개성이 명확해서 매력적인 색을 가졌고, 관계에 있어서는 ‘신뢰’와 ‘경계’, ‘복수’와 ‘인과응보’라는 미묘함이 어우러져 있다.


집단은 개인 없이는 가능하지 않고, 개인은 관계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사회 속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 사이에서 느끼는 이질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우리는 혼란을 겪기도 한다.


<이태원 클라쓰>의 두 주인공인 박새로이와 조이서라는 캐릭터가 대단한 점은 이러한 이질적인 정체성의 혼란에서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기준이 늘 서로에게 있다는 점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는다는 점이다. 왜인지 몰라도 드라마에서는 무척이나 당연한 것만 같은 이 모습도 현실에 가져오면 동화이고, 판타지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복수’는 드라마의 오랜 트렌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이처럼 자극적인 소제는 없을 것이다. 복수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옛날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사부님의 원수!” 또는 “부모님의 원수!”를 외치며 칼을 휘두르는 방식은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이제 촌스러운 방식이다. 사실 <이태원 클라쓰>도 결국에는 “아버지의 원수!”를 외치고 있지만 현대화된 방식을 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칼은 결국 ‘돈’이다.


복수도 점차 세련된 방식으로 변화하는 걸까? <더 글로리>에서 송혜교가 행한 복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에서나 나올법한 방식이었다. <이태원 클라쓰>의 복수는 <낭만닥터 김사부>에서의 복수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드라마에서의 복수는 현실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판타지가 섞여 있어서 박수를 치다가도 돌아서면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든다.


이런 비현실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비단 이런 작품들이 비현실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이나 영화의 중요한 일부분은 늘 현실성에 있고, 현실 비판이 큰 몫을 차지한다.


‘복수’라는 명명보다 ‘정의 구현’, 악에 대한 ‘응징’으로 부른다면, 개인의 사회적 욕구를 자극하지만, 현실 사회 속의 개인에게는 법의 테두리를 떠나 도덕적 가치관에 먼저 와닿아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괴리감을 채울 길 없는 현실에서는 판타지가 될 뿐이고, 반복되어 익숙해지면 극화 속의 악이 현실에서 활개를 쳐도, 이미 현실의 극복할 수 없는, 극복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체념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즉, 대중예술 작품들의 의도와 반대되는 모순을 낳게 되는 부작용이 생겨난다. 이건 마치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방식처럼, 대중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소비하고 즐긴다.


<이태원 클라쓰>에서 악역인 장 회장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을 불러 외친다. 약육강식을 불러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다.


권력과 기득권을 꼭 움켜쥐고 자신의 생애를 그걸 지켜내는 것으로 명분 삼는다. 지켜낸다는 것은 언뜻 수동적이고 방어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약자를 짓밟고 사냥하는 것으로 자신의 명분이 지켜진다고 생각한다. 내 쪽에 서지 않은 이는 모두가 적이고, 소멸하고 말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삶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일 뿐이고, 내가 먹지 않으면 먹히는… 말 그대로 약육강식이 그들 삶의 방식인 것이다.


개·돼지는 살육해도 전혀 양심상 거리낌이 없는 존재들이고, 닭 모가지를 비틀어 취하는 심리적 불안을 강해질 수 있는 근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권력이 천년만년 갈 것으로 생각하지만, 약육강식이라는 말 자체에 어떤 결과가 결말이 될 것인지 이미 들어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서 빠지기 쉬운 허구이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커다란 구렁텅이다.


사실 얽히고설켜서 그렇지, 장 회장은 가만히 둬도 언젠가는 망할 운명이었다. 박새로이나 조이서가 맞서지 않았어도 곧 무너질 모래성이었다는 이야기다.


‘공자’가 말하길,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았던가! 장 회장은 ‘수신’도 ‘제가’도 엉망인 상태에서 ‘치국’과 ‘평천하’를 꿈꾸고 있기에 결과는 뻔하다. 물론 공자님 말씀이라고 모든 인간의 삶에 적용해서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리적 개인과 사회적 개인 사이에서 인간보편성에 합리적인 시야를 제공해 주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현실에 빗대어 얘기해 보면, ‘장가’라는 기업은 우리나라처럼 보인다. “장가가 바로 나고, 내가 곧 장가다!”라고 외치는 장 회장의 모습에서 어떤 못난 위인의 이미지가 겹치는 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권이나 권력층 사람들이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서, “이게 어디서 감히!”라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 대부분은 가장 기본인 ‘수신(修身)’ 단계에서부터 글러 먹은 족속들이다. 그리고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어 세금을 받고 일하는 ‘직원’ 일뿐인데도,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그들은 자신들이 먹이사슬에서 포식자라고 생각하고, 계급과 직함으로 이름을 치환한다. 솔직히 인간으로서는 부끄러운 이름이지 않은가. ‘사람’을 포기하고 스스로 짐승이 된 것도 모른 채, 기고만장(氣高萬丈), 안하무인(眼下無人), 적반하장(賊反荷杖)과 같은 중화기로 중무장한 채, 오늘도 벌건 눈알을 굴리며 사냥감 찾기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3으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태원 클라쓰 #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