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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Oct 20. 2023

이태원 클라쓰 #3/4

알아서 기는 더 나은 사람들

03. 알아서 기는 더 나은 사람들


이쯤 해서 첫 글에서 물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더 나은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복수를 하든, 짐승이 되든 또는 그저 살아가는 것 자체에서조차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시스템의 오류는 인정하지 않고 부속적인 주체에 대해서만 정체성과 정당성에 대해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들 답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이 엉망이라서 국민의 삶이 팍팍한 것인데, 국민에게 끝없이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주문하면, 아무런 저항 없이 무작정 졸라매야만 하는가?


‘더 나은’이라는 말은 상대적인데, 박새로이의 인성은 장 회장에 비해 이미 더 나은 사람인데 뭘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 문제는 ‘더 낫다’라는 말의 해석에 달린 문제로 보인다. 말 자체는 개인적 자아의 ‘도덕적·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다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의미일 것 같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는 그런 의미로 강동주에게 이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태원 클라쓰>에서 박새로이가 장대희 사장을 상대로 하는 복수의 요건 또는 조이서가 장근수에게 던지는 조건, 강민정이 박새로이에게 요구하는 조건 등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적 차원의 조건들이고 부의 월등함을 전제로 한다. 즉, ‘더 나은 사람’이란 상대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야 가능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태원 클라쓰>에서 말하는 ‘더 나은 사람’의 요건이야말로 바로 현실을 사는 우리가 세뇌된 관념이 되었다. ‘더 나은 사람’이란 사회 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많은 부의 축적을 통해 계급과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장 회장이 말한 ‘약육강식’의 방법론은 정당한 것이 되고 만다.


앞에서 결론이자 동시에 질문으로 말한 것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우린 이미 안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더 나은 나’와 사회에서 요구받는 ‘더 나은 나’에는 이토록 큰 격차가 있다.


이미 아는 것을 어떤 선을 그어 누구에게 판단받는다는 말인가? 알고 있는 주체는 자신인데, 알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한 변질을 자기합리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이런 무의식적으로 관념화된 사회적 강요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커다란 사회 시스템 전반을 어떤 헤게모니가 지배하고 있느냐에 따라 개인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 의미를 다시 꺼낸 이유는 이 드라마의 핵심이 ‘복수’에 있기 때문이다. 방식이야 어쨌든, 복수는 개인이 억울한 심정을 달래거나 극복해 보려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사회적 헤게모니 지배에 대한 저항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으로도 볼 수도 있다.


‘증오’가 바탕이 된 짓거리. 인간다움보다 재력을 선택한 인간을 향해 복수하기 위해서 재력을 쌓는다. 자본으로 경쟁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끝내 잡아먹겠다는 생각은, 박새로이가 장 회장이나 장근원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했을까?


이루는 과정에서 개인은 당당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유사한 사회적 조력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혼자일 수 없는 사람의 한계 내에서 자신의 증오가 합리화되는 것을 어떤 이름을 붙여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중졸에 전과자’. 드라마에서 박새로이는 사회적으로 매우 불리한 여건으로, 자주 이렇게 거론된다. 사회가 그를 보는 사회적 정체성이다. 이건 사실 학력의 문제나 불구의 문제 같은 게 아니다. 멀쩡한 사람도 하루아침에 빨간색을 입히면 빨갱이가 되는 세상,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밀려나는 사회라면, 낙인은 인격과 실력, 양심 따위와 상관없이 이미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이는 드라마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운이 좋은 친구다. 현실 사회라면 아무도 그의 억울함에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잘못된 것이 분명한데도 그것이 사회적 함의로 인정된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비슷한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 옆 사람을 살필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약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변질된다면, 더 나은 사람의 의미는 퇴색한다. 결국 기준도, 인정도 내가 아닌 사회적 시선에 의해 다시 정해지고 인정받아야만 하는 아이러니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건 또다시 개인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트라우마로 남고 만다. 결국 사회적으로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나 자신을 극복해야 할 상대로 맞서는 건 슈퍼맨에게도 가장 힘든 일이었다. 약자가 자기의 가장 아픈 부분을 스스로 노점상 상품처럼 드러내야만 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사회적 판단과 인정을 구걸해야만 한다는 것. 어찌 보면 복수보다 더 잔인하고 무섭지 않은가?


사회적 조력이란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은 맞다. 스스로 소시오패스라고 자신을 설명하는 조이서, 감옥에서 만난 조폭 최승권, 사회에서 소외된 트랜스젠더 마현이는 적극적으로 박새로이를 돕는다. 그 동기는 오직 박새로이에게 끌리는 인간적인 매력 외에 설득력 있는 동기가 없다.


또한 장근원에게 괴롭힘 당하던 친구 이호진은 직접 감옥에 있는 박새로이를 찾아가 면회하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 반면 새로이의 억울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오수아는 장대희 회장 편에 선다.


강민정 전무가 박새로이와 손을 잡는 이유도, 오병헌 형사가 마음을 돌리는 계기도, 결정적인 순간에 부동산 큰손 김순례와 연결되는 방식도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다음에야 절대로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건 로또가 당첨될 확률보다 희박하다.


너무 부정적인가? 맞다.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왜 현실 사회는 가치들이 지켜지지 않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걸까?’ 하는 의문도 살짝 풀린다.


앞서 사람들은 모두 정의를 알지만, 모두가 외면한다고 했다. 내가 부정적인 게 아니라, 현실에 어떤 방식으로 순응하게 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 사회가 점점 각박하고 메마른 현실에 익숙해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체념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제 억울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외치고 외쳐도 그것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일부러 듣지 않는다. 그들은 그걸 ‘조련’으로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가습기살균제 참사 등. 그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대처를 보라. 청춘을 빼앗긴 위안부 할머니들, 부동산 사기에 집을 잃은 사람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을 보라. 거기에 대해 국가는 법과 권력을 활용해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사람을 선별하고, 편 가르기를 자행해 약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극단적인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다.


권위만 있고 책임은 없는 사회에서 약육강식은 법이 되고, 각자도생은 유일한 생존법으로 남는다.

개인은 사회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도덕적·윤리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랄까? 아니면 영혼을 팔고서라도 재산과 권력을 바랄까?


우리 사회는 소외된 약자에 대해 온통 외면하고 무관심하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힘이 강하다는 대중의 여론조차 무관심과 증오로 물들고 있다. ‘중졸에 전과자’는 선한 의지와 신뢰가 바탕이 된 조력자가 없었다면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가 원양어선을 타고 돈을 좀 모았다고 해서, 현실 사회에서 과연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가 왜 중졸이 됐는지, 왜 전과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는 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약육강식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가해자들이 더 잘 산다. 그들은 무관심과 소외 위에 선다. 그래서 모두 포식자가 되려 한다. 그게 인간에서 짐승이 되려는 짓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생존의 위협 앞에서 정의(正義)와 도덕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외면할 수밖에 없다. 알아서 기지 않으면 위협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묻는다. “더럽고 치사하지도 않냐? 도대체 왜 그러냐?”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말한다. “먹고살자니 어쩌냐, 더럽고 치사해도 알아서 기어야지.” 그런데 만일 당신이 알아서 길 것까지 예상해서, 그 심리적 습성을 파악하고 악용하는 악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4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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