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질문, 그리고 명확한 답변
자유 경제와 자본주의는 A.I처럼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오류가 있으면 파악해서 고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A.I에 대해서, 생명공학에 대해서도 비슷한 공포감을 느낀다. 창조자가 피조물에 느끼는 공포는, 이제 피조물의 오류가 예상되어도 그것을 고칠 수 없다는 현실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생명 단계를 조작할 수 있는 힘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만난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자유 경제 체제 내 오류의 더 큰 문제는, 모든 공포와 고통은 약자의 몫이 되고, 권력과 거대 자본에 맞물린 첨단과학과 생명공학의 진군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당장 생채기가 나지 않아 고통이 없다고 해서 내일의 하늘이 마냥 푸르를까?
거대한 시스템 내부의 아주 작은 I.C칩, 내지는 그보다도 유용성이 적은 부품으로 전락해 가는 인간.
종교 문제로 전쟁이 벌어져 수백, 수천의 생명이 죽고 있지만, 그 종교와 신을 누가 만들었던가? 고쳐낼 수 없는 지경이 된 시스템을 어찌할까? 경제가 인간 삶의 모든 가치 척도가 된 이유는 뭘까? 정치는 어쩌다 사회적 이념에 몰두해 침몰하게 되었나? 만일 순위가 있다면 ‘인간 존엄’은 어디쯤 있는가?
문제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 사실 복잡할 게 없다. 진리는 우리가 있기 전부터 있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이념에 따라 달라진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얄팍한 심리다. 진리는 명확하고 뚜렷하게 있다. 단지 우리가 그걸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지에 달린 것이다.
세상이 각박하고 차디차다고 혼자서 주먹 쥐고 일어 선들,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모기가 웽웽거리는 소리만도 못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야 할까?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해야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힘이 세다. 아마 ‘강남순’이나 ‘도봉순’보다도 훨씬 셀 것이다. 언어의 설득력은 글로 기록되어 논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어느 면으로든 어필이 된다면 가치가 생긴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건 개인의 자유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한다. 자괴감에 빠진 사람들, 희망을 버린 사람들, 좌절과 체념에 빠진 사람들… 그들도 결국 사회적 관계에 있고,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에 가야만 한다. 그 섬에 도착해서 그들만의 방언을 듣고 이해해야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복잡함을 빼자. 기타 등등 다 빼고, 정의만 말해보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유지하느라 급급한 현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개인의 정의와 사회의 정의는 무엇이 우선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습게도 전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정의를 이미 알고 있고, 바라는 바도 비슷하다. 그것을 가로막는 악은 방법을 달리할 뿐, 목표는 확고하고 획일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약자들이 뭉치는 것이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정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갈라지고 분열하고 반목하는 것이다. 정의의 의미를 잊는 것이다. 전쟁이나 싸움의 개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승패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사람이, 사람이 좀 되자는 것이다.
우리가 정의를 이미 알고 있는 이유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이유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알면서도 외면하기도 하고,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지켜내고자 희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선택이라는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인데, 어떤 선택이 되었든 거기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명백하고 확고한 동기를 따르느냐 외면하느냐 역시 개인적인 자유다. 그러나 ‘자유’라고 말했으나 거기에 따르는 책임과 인간 본질, 그리고 영혼에 대한 외면을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태원 클라쓰>가 한창 시청률을 올릴 때, 덩달아 흥행에 성공한 OST가 록 밴드 국카스텐이 부른 <돌덩이>다. 걸출한 보컬 하현우의 놀라운 성역(聲域)이 아니더라도, 그 직선적이고 강직한 노랫말에서 화면으로 보는 ‘다음화 예고’보다 더 확고한 드라마의 색깔을 읽는다.
그러나 돌덩이가 단단해 봐야 얼마나 단단하겠나? 타격이 가해졌을 때, 모질게 두들겨 맞았을 때, 아픈 몸뚱이와 달리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맞다. 하지만 인간의 육신도 한낱 물질계의 하찮은 존재의 하나일 뿐이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도 파이고 상할 수 있는 돌덩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 강하다는 것은 단단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갈댓잎처럼 이리저리 흐름에 따라 편승하며 드러눕는 것도 아니다. 인간 정신의 강함이란 그런 강함으로 비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신을 고집하면 손해 본다는 말은 빼빼로 데이에는 반드시 빼빼로를 사 먹어야 한다는 홍보 문구를 맹신하는 것과 비슷한 어리석음이다.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내 상대를 속이려 한다. 당연히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월등하다. 사람 속이는 일은 쉬운 줄 아는가?
거짓말의 가장 힘든 부분은, 최초의 거짓말을 덮기 위해 다른 새로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또 새로운 거짓말을 계속해서 지어내야 하는 것에 있다. 문제는 최초의 거짓말부터 이후의 거짓말들이 모두 앞에 한 거짓에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은 금방 들통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거짓은 언젠가는 드러나고, 권력과 힘으로 눌러 가라앉힌다고 해서 해저로 가라앉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신이나 신뢰는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밑거름이다.
오수아는 박새로이가 선택한 방식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15화에서 오수아는 숨겨온 것들을 비로소 꺼내놓는다. 오수아는 병들고 쓰러져 가는 장 회장에게 사표를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제가 입사하면서 10년간 모은 장가의 비리 파일입니다. 차명주식, 비자금, 청탁, 뇌물. 힘과 공포만으로 사람을 움직이기엔 한계가 있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오수아라는 여자는 무려 10년간, 혼자서 계획했던 방식으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행동하며 계획을 진행해 온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가장 완벽한 방법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박새로이가 장 회장의 힘에 굴복해 쓰러져 비참하게 사라졌다면, 오수아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녀에게는 그 순간이 되기까지 선택의 순간이 더 남아 있었기에 흔들릴 수 있는 여지 또한 스스로 만들었다.
<더 글로리>의 송혜교처럼, 오수아가 선택한 방식은 그랬다. 상대가 병들고 약해져, 작은 짐승이라고 해도 달려들 순간을 엿보는, 그런 시기를 기다렸다가 날카롭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엿을 먹이는 복수!
반면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 여자도 있다. 조이서는 나이도 어리고 욱하는 성질도 있고, 타인을 이용하거나 상처 줄 수 있는 머리와 능력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같은 10년의 세월을 다르게 보낸다.
15화에는 조이서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손에 들고 한 대목을 되새길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연민의 정이야말로 더없이 깊은 심연이 아닌가. 생을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면, 고뇌까지도 그만큼 깊이 들여다보게 마련이다.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까지 죽여 없애준다.”
이 글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 나오는 일부이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연민의 시작이고, 삶의 심연 속 고뇌를 이해하면 용기가 생겨난다. 사랑을 초월한 감정은 끔찍한 생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반복해도 좋을 만한 기쁨이기에, 후회 없이 결정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 드라마의 타이틀 문구처럼 ‘소신에 대가가 없는 삶’이었기에 이서의 선택은 훌륭했고, 그녀의 사랑은 고귀하다.
니체의 문구는 이렇게도 증명된다. 죽음의 단계에 몰렸을 때, 박새로이의 꿈에 나타난 아버지는 그에게 변함없이 말한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이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 아들!”
상처와 고통, 아픔으로 점철된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계속 그렇게 살라고 말한다. 극한의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는 참된 용기의 동력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인 것이다.
천하의 악당 장 회장이 정말 악당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들을 저버렸을 때이다. 그는 부자지간의 ‘사랑’보다 ‘장가’라는 재화를 선택한 것이다. 장근원의 정체성에 있어 장 회장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크다. 부자지간을 떠나서 보더라도 그런 사회적 관계성이 없었다면 답은 조금 달랐을지 모르나, 원초적인 기본으로 돌아가 인간 대 인간으로 봐도 자기 이익과 평안을 위해 타인(지인)을 저버리는 건 역겨운 행위다.
사랑하는 감정에 이유가 없듯이, 미움이나 증오에도 이유가 없을까? 사랑에 ‘나’를 앞세우지 않듯이, 미움이나 증오에도 ‘나’를 앞세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모순이 된다.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에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좀 더 솔직해야만 한다.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생각한다. ‘어! 비 오네…’ 등짝이 아프고, 허리도 쑤신다. 웽웽 소리도 난다. 머릿속에 모기가 들어갔을까? 아무래도 뇌를 꺼내 모기약을 좀 뿌려야 할 것 같다. 젠장… 비는 왜 오고 지랄이야! 추워지면 더 쑤실 텐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