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회귀
국가는 일종의 테두리였다. 이 말을 과거형으로 적은 이유는, 최첨단 과학과 정보통신 덕분에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허용되는 세계에서는 점점 의미가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개인 단위에서 가족의 의미가 희박해지듯이, 세계 단위에서도 국가의 의미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반면에 희미해지는 자체가 다시 국가나 체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끌어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법이란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앞서 예를 든 뉴스의 판결처럼,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에 대해서 또는 세계라는 약육강식 체계 안에서 미리 굴복하도록(알아서 기는)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세밀하고 체계적인 그물망처럼 개인 단위까지 제어할 수 있는 도구로써의 법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연 대한민국 국민에게 어떤 테두리를 제공하고 있을까?
우리는 현재 이런 단순한 질문에 대해서도 올바른 답변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아가 진실 호도의 주체는 더 문제다. 우리나라 정부가 앞장서서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에 대한 홍보 및 변호를 일삼고, 법원은 기득권과 권력을 옹호하고, 언론과 지식인은 겁을 먹고 입을 다물거나 거짓을 호도한다. 교육자는 교육을 기업화하여 이익을 우선하고, 대학은 개인의 성공만을 가르칠 뿐 사회 내에서 지적 역할을 그만두었다. 의료계 역시 정치에 휘둘리면서 생명마저 점차 상품화 조건으로 변해간다. 과학과 기술의 가치도 자본에 잠식된 지 오래고, 생활물가는 오르고, 서민과 노동자들은 탄식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인에게 평등해야 할 법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관용보다는 처벌만을 강요하며, 경찰이나 검찰과 같이, 원래는 시민을 위해 제 역할을 해야 할 공권력도 기득권과 권력의 편에 서서 작용한다. 언론이나 출판, 시위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도 무의식적 수준으로 자체 검열이 가해진다. 마치 민주주의의 본질적 바탕은 이미 다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비참한 생각마저 든다.
정치, 지긋지긋한 게 맞다. 개인의 삶과 대중의 삶 전체를 관장해야 하고, 먼 듯 가까이 둬야 할 거대한 시스템.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은 하나 같이 국민 바람의 털끝도 따라오지 못하는 구시대적이고 미개한 수준이다.
정치가들의 머릿속은 정말 이해하기 난해한, 그야말로 현실 세계에서 멀리 동떨어져 있는 별나라 외계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거대한 정치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주체는 민중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방식에 맞추어 우리가 선택하고 개선하고 바꿔나가면서 힘을 실어줘야 현재를 지탱할 수 있고, 다수의 구성원이 함께 살 수 있다.
모두가 실망에 가득해 외면하고 무관심하고 지루해하고 재미없고 지긋지긋해만 한다면, 민주주의도 소외된 약자의 모습과 같아질 것이다.
내일 당신의 자녀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하거나, 도시 골목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압사당하거나, 즐겁게 여행을 떠났다가 바다에 수장당하거나 또는 그보다 더한 일이 생겨나도 우리는 책임을 물을 수도, 권리를 외칠 수 없게 된다. 그저 공허한 개·돼지의 소음으로 전락한 후일 테니 말이다.
문제는 현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래는 더 문제다. 눈을 가리고, 입을 틀어막고, 거짓된 정보를 주입하기 위해 모든 힘과 권력, 법과 공권력이 몰두하도록 방치한다면, 그것은 주권자로서 '직무 유기'이다. 무관심하고 외면하면서 자기에게 잘못된 부분, 자기에게 불편한 부분만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혼자 살아가려는 게 아니라면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 권리를 내세우려거든 거기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자식이, 내 이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억울한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힘든 상황에 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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