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uttered_8
가끔은 주제 넘게 술을 즐기다 탈이 난다. '술 좋아합니다' 라고 당당히 얘기하지만 말의 진정성과는 별개로 능력의 문제에 부딪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선 마음처럼 마시지 못해 스스로도 좀 아쉬울 때가 있고, 혼술이 아닐 경우엔 술을 좋아한다는 말에 한껏 기대치가 부풀었거나 함께 오늘 밤을 달려보자는 생각에 흥이 오른 동석자에게 의도치 않은 실망을 안겨주게 되는 점도 애석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맥주와 레몬소주로 첫 술을 시작했지만 독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주는 한 잔을 넘기는 게 고역이다. 위스키나 보드카처럼 식도가 타들어 가는 뜨거움은 덜하지만 화학용 알콜의 그 향과 정확히 표현하기 힘든 인공 감미료의 맛을 견디는게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번은 애주가인 친구 하나가 못 배웠다며 농담조의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래도 아주 잠깐 소주를 3-4잔까지 즐겼던 적이 있는데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와 곱창과 백순대를 먹으러 종종 다니던 때였다. 술을 잘하던 그 친구는 곱창과 백순대에는 입을 깔끔히 정리해 주는 소주가 궁합이 맞는다며 권했고 음식과 술의 밸런스를 나름 중히 여기던 나는 한 번의 시도에 바로 그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대창이나 양을 입에 넣어 반 쯤 씹고 입 안에 털어 넣는 소주에서는 질색하던 그 향이나 냄새가 덜 했고 오히려 불판 위 잘 구워진 다음 한 입을 찾아 젓가락을 바삐 움직이게 했다.
가장 오래 즐겨 마셔온 술은 맥주이다. 2잔 정도를 딱 좋아하고 3잔까지는 즐겁지만 그 이상은 버겁다. 타고난 능력 부족이 큰 몫하지만, 한 때 몸이 안 좋아 스무 알 가까운 강도 높은 약을 장복했던 이력이 간기능을 확연히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거기다 30대 중반부터는 맥주의 배부름이 또 하나의 방해 요소가 되었다. 젊은 날엔 못 느꼈던 맥주로 가득 채워진 배의 부대낌이 꾀나 불편하다. 그래서 요즘은 혼자 집에서 영화를 보며 마시는 맥주 한 캔 정도가 가장 만족스럽다.
2-3년 전부터는 와인을 가장 즐겨 마신다. 매주 한 번쯤 집에서 혹은 자주 가는 업장에서 2잔, 많으면 3잔 정도를 마신다. 뭘 잘 알고 마시는 와인은 아니다. 안전하게 비싼 와인만 골라 마실 능력도 없다. 한 술 더떠 레드는 잘 못 마시고 화이트 역시 소비뇽블롱, 샤도네 등 대중적인 포도 품종은 잘 맞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는 맛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엔 진입장벽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와' 하는 한 모금이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감동은 20년 가까운 나의 술 역사에서 다른 어떤 주종도 주지 못한 것이었다. 외식을 하면 주로 다니는 몇 군데를 돌아가며 방문하기에 참 감사하게도 오래 걸리지 않아 와인을 서빙하는 단골 업장들에서 나의 취향을 발견해 주셨고 이제는 척하고 알아서 소개하고 추천해 주신다. 덕분에 나 역시 마트나 와인 아울렛에서 내게 맞는 와인을 찾는 요령이 생겨갔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저녁 나의 가장 좋은 술벗과 집 근처의 새로운 업장을 찾아 갔는데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다. 몇 번 지인에게 추천을 받았던 곳이었지만 섣불리 갈 생각을 못하다 무슨 연유인지 그 날은 마음이 동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따뜻한 공기가 차분히 흐르던 4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다. 시원한 빗소리가 음악이 되어 흘렀고 소박한 공간이 품은 어두운 빛과 무드에 우선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음식과 와인을 서빙하시는 두 분의 업장에 대한 애정,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 얼핏 단출해 보이지만 술과 딱 어울리는 메뉴 구성에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건, 바로 알자스(Alsace)와의 첫 만남이다.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 Marcel Deiss의 화이트 와인이 그 시작이었다. 한 종의 포도만 생산하는 게 아니라 토양에 맞는 다양한 품종을 재배하고 블렌딩하는 팜블렌딩(Farm blending) 방식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회사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다양한 향과 풍미가 우아하게 조화를 이뤘고 한 잔 한 잔 그 맛과 깊이가 달라졌다. 클래식하면서도 개성이 분명한, 우아한 내추럴 와인이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우리를 위해 더 열심히 알자스 와인에 대한 여러 가지 스토리를 들려주시고 다른 와인도 테이스팅 할 수 있게 내어주시는 두 분 덕분에 그 날 나는 참 오랫만에, 기쁜 마음으로 대차게 나의 주량에 도전했다.
그 후로도 내추럴 와인을 서빙하는 곳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생기면 항상 알자스 와인이 있는지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데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다. 첫 만남을 함께 했던 그 술벗은 알자스를 향한 변치 않는 나의 애정을 응원하며 알자스 와인에 대한 일러스트 책을 선물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꼭, 멀지 않은 미래에, 알자스에 가서 프랑스의 빵과 치즈, 와인에 우리를 실컷 내던지자고 몇 번을 약속하고 다짐했다.
'술을 잘한다'에 대한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술을 잘하는 것 보단 각자의 속도와 취향으로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술을 '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술벗은 아마 소주 한 병을 보편적인 기준선으로 삼을 것이고 내가 맥주 한 잔만 들이켜도 경탄하는,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우리 고모들은 분명 다른 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 잘 마시고 못 마시고 이런 구분이나 잣대와 관계 없이 '술 좋아합니다' 를 담백하게 말할 수 있고 또 수용해 주는, 그런 문화가 확실히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혼술을 즐기지만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거나 혹은 하고 싶은 날들도 있는데 그럴 때 맞은 편에 앉은 누군가의 주종, 주량, 속도 등에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취향과 템포에 따라 술을 즐길 수 있는 술자리가 될 수 없다.
" 술 좋아하세요?"
"네, 술 좋아해요."
"아니요, 전 술 못해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이 문장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