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말 2
#Uncluttered_문장_1
-"자기 자신과 불일치(disunity)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unity)니까." 내가 나 자신과 통일돼 있지 않다면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요. 이를테면 그건 도덕 영역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인데,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보아도 여전히 타당한 얘기에요. 이 생각의 전제라면 실제 현실에서 내가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나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나는 이러저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 짓을 저지른 누군가와 같이 살길 원치 않으니까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TV, 인터넷 기사들의 뉴스를 골라보기 시작한 지 제법 됐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 혹은 정보들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방식이 점점 버거워진데다 깊이 있는 취재와 고찰을 담은 뉴스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TV에서 조차 뉴스가 담아내지 못하는 요소들을 대중의 기호에 맞게 적절히 버무린 시사 프로그램들이 양질의 컨텐츠를 생산해 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선택한 주제와 문제를 다룬 뉴스, 기사, 프로그램을 선별하여 뉴스를 접하고 있다.
정재계의 각종 탈세, 횡령, 부패 등 다양한 위법 행위와 그에 따른 기소, 구속 관련 소식들은 차라리 낫다. 그들의 권력 게임에서 양산되는 수많은 기사들은 내가 사는 세상이자 동시에 그들만의 세상이라고 인식하는데 점차 익숙해진 게 주된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의 비판 혹은 비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채널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음은 물론 나를 대신해, 우리를 대표해 적극적으로 문제에 개입하고 행동하는 개인, 단체, 조직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늘어나는 것도 '차라리 낫다'라는 표현에 일정 부분 당위성을 준다.
내가 정말 무력감을 느끼고 그래서 자꾸 회피하게 되는 건 그보다 더 가까이 있다.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프라이팬에 손을 지진 계부의 학대를 피해 도망친 9살 소녀, 여행용 가방 안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된 후 결국 목숨을 잃은 아이, 기사화가 되고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분노가 치미는 N번방 사건, 지하철 역에서 지나가는 여성에게 가해진 정황도 이유도 없는 묻지마 폭행. 위조지폐 사용 관련 용의자라는 명목하에 8분 가량 무릎으로 목을 짓눌러 살려달라 호소하는 시민을 사망에 이르게 한 미국 경찰.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이런 뉴스들에서 느끼는 분노와 무력감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스토리의 가해자들은 분명 우리 사회의 소수이고 상식과 격률을 가진 평범한 너와 내가 이 세상의 다수라는 사실도 그 감정을 추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매번 머리와 가슴에 구멍이 난다. 이 세계와 내가 철저히 불일치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전통적 방식의 뉴스 시청과 기사 읽기를 버렸다. 나와 통일되지 않는 세계 혹은 세계와 통일되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에 항복했다. 그리고 나와 통일하는 것으로 도피처를 찾았다. 비겁해 보인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실제 현실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나는 그렇게는 안 살겠다' '나는 그런 사회에선 안 살겠다' 하고 나름의 저항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대화하려 노력한다. 그녀의 말처럼 세계와 굉장히 심하게 분열하고 있으니 나 자신, 친구 혹은 다른 자아와 대화하는 데 의지한다. 글쓰기도 그런 대화의 방식 중 하나이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무력해 보이지만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명제를 나름 치열하게 고수하는 것이다.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거에요.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를 말하는 거에요. 따라서 이런 생각의 뒤편에 있는 추정은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거에요. 내가 세계와 굉장히 심하게 분열해서 나 자신과_어쩌면 친구와, 그리고 다른 자아와_대화하는 데 의지하는 것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들이 있을 수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근사하게 말한 '자기 안의 타인(autos allos)'처럼 말이에요. 내가 보기에 이것은 무력한 상황이 실제로 어떠할지 보여줘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냥 뚜벅뚜벅 갈 길을 간 사람들은 자신이 무력하지만 이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무력한 누군가도 여전히 사유할 수 있다는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죠.
무력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많다. 그리고 그 무력감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 것 같아 수치스러운 순간은 더 많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의 지리한 싸움에서 길을 잃을 때, 길게 숨을 내쉬고 깊은 위로를 들이마실 수 있는 문장이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