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함부로 대하는 편이다.
“넌 왜 이렇게 너 스스로 가학 하는 거니.”
언젠가, 작업실 언니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 당시 어설프게 대답을 늘여놓았지만 거짓말이다. 내 안에 있는 폐허를 언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또, 언니가 내 진심을 들으면 걱정할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글로 말을 해야겠다. 내가 왜 날 이렇게까지 가학 하는지. 얼굴 보며 말하면 언니의 애틋한 시선에 속내를 말하지 못할 테니까.
사실 난 삶에 대한 애착이 없다. 자식 앞세운 부모 만들지 말라고 했던 엄마의 말에 억지로 살아내고 있을 뿐. 작가로서 살고 있는 지금 행복하긴 한데, 행복한 것과 삶을 사는 건 또 다른 문제고. 그래서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한다. 사람에 사랑에 진심에 헤픈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밤 낮 뒤바뀐 생활을 하며, 건강을 해친다. 이렇듯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를 죽인다. 스스로 목숨을 던질 용기는 없고, 치사한 방법으로 자살하는 중이다.
엄마는 날 왜 낳았을까.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엄마는 레지던트 4년 차에 날 낳았다. 논문, 전문의 시험, 병동 치프로서 정신없었을 텐데. 예전엔 3월 10일이 노동자의 날로 휴일이었다. 바쁜 와중에 빨간 날에 맞춰 기어코 날 낳았다. 엄마의 치열한 삶 속에서 태어난 내가 이쁨 받으며 컸느냐. 아니다. 병원 생활로 바빴던 부모님은 젖을 막 땐 갓난아기를 할머니 손에 맡겼다. 그 무렵 고모들과 할머니가 언니 및 사촌들을 공동육아 중이었는데, 그들은 유독 나에게 잔인했다. 부모님의 보호 없이 당했던 어른들의 날 선 공격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 깊숙이, 또박또박 박혀있다.
착한 것 빼고 볼 품 없는 애.
멍청할 만큼 눈치 없는 애.
못생긴 애.
가치 없는 애.
실패작.
필터링된 게 이 정도다.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특출 나게 잘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까내리고 엉망으로 만들기 바빴을 것이라는 걸. 그래서 난 무해한 존재가 되기 위해 ‘착한 것 빼곤 볼 품 없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러다 보니 난 남동생을 낳기 위한 징검다리 같다고 생각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집안의 딸, 딸, 아들 중 둘째 딸. 샌드위치 차일드. 그게 내 위치.
불안정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라면서 내가 뭘 하든 지지받고 자랐을까? 단언컨대 나는 부정당하는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가 취미였는데, 내가 쓴 단편 소설이 상을 타기도 하고 글을 모아 잘 꾸며둔 홈페이지가 베스트 홈피가 되어도 놀라울 만큼 관심 갖지 않았다. 그저 공부, 공부, 공부.
그러니 언젠가 만화책을 몰래 보고 있던 나에게 화가 난 아빠가 만화책을 찢으며,
“학생이 공부 안 하고 만화책이나 봐? 이럴 거면 미대나 가!”
라는 호통 한마디에 바로 미대 진학을 결정했다. 그림에 관심도 재능도 없던 내가 아빠의 날 선 말 한마디에 미대 진학을 결정할 만큼, 나는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관심 없었고 스스로도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내 세상은 어딘가 미묘하게 망가져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형편없는 인생을 살던 내가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꼈던 건, 유학을 성공리에 마쳤을 때다. 부모, 친인척으로부터 벗어나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하며 공부했던 때. 그러다 작품으로 인정받았을 때 나는 나를 처음으로 칭찬했다. 그게 29살이었다. 이 말은, 29살이 되어서야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웃으면서 한국에 왜 돌아왔는지 화려하게 포장된 썰을 풀지만, 나는 돌아오기 싫었다. 가족도 친인척도 없던 영국이 자유롭고 편했다. 숨 쉬듯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ㅇㅇ이 요즘 뭐 해? 아, 회사 다녀? 유학까지 가서는 미술 안 하고 전혀 다른 거 하네? 돈 아깝겠네, 그 집 부모.”
식의, 날 선 말들. 그 말들 속에 매일 발에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었고 폐까지 찌르던 눅진한 한국 공기가 나를 수렁으로 끌어당겼다. 이런 형편없는 딸이어서, 엄마 미안해. 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공허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영국에서는 나름대로 날 사랑하며 당차게 지냈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관성처럼 나는 나를 엉망으로 이끌고 갔다. 그러니 그 인생의 큰 이벤트도 말도 안 되게 치렀던 거지. 비극으로 막이 내릴 것을 사실 알고 있었으면서, 난 또 날 망가뜨린 거다.
그러다 작업실 언니와 같이 지내면서 나와는 다르게 지지받는 삶을 사는 언니가 신기했다. 언니가 아니라고 하면 언니의 어머님은 언니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렇게 자란 사람의 삶이 궁금했다. 곁에서 다정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나처럼 절망적인 폐허 따위 존재하지 않겠지. 그러다 언니의 긍정적인 에너지에 영향을 받아 어버버 하다 보니 상도 타고 개인전도 치렀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나로, 작가로 괜찮은 사람인지.
“은성아, 너는 스스로에게 너무 박한 것 같아. 좋은 일은 그저 좋은 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좋은 일 앞에서도 네가 비관적으로 구는데, 오려던 복도 도망갈 것 같아. 공예전에 당선 됐다, 난 잘했다. 그냥 받아드려.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으로 구는 것도 스스로에 대한 가학이야. 마치 햇빛이 짱짱한 날에 텐트 안에서 선글라스까지 끼고 언니 너무 어두워! 하는 거나 다름없어. 좋은 일에 왜 백 프로 행복해하지 못하니. 언니 너무 슬프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쥐어짜듯 작업을 하는데 작업이 진심으로 행복하게 느껴져? 난 너처럼 작업하면 너무 불행할 것 같은데.”
공예전에 당선된 후 느꼈던 무수한 감정들에 관한 긴 글을 올렸었다. 도피하듯 떠났던 홋카이도에서 그것들을 활자에 꾹꾹 눌러 담아 흘려보내는 동안 타자를 치며 울컥하기도 했다. 감정의 배설을 거칠게 끝낸 후 차분해진 감정으로 작업실에 돌아와 작업실 언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가 올린 글을 읽은 언니가 한 말이었다.
‘좋은 일은 그저 좋은 일로 받아드려.’
누구에게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운 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말.
그러나 이상할 만큼 나는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게 어렵다. 실패작으로 태어나 실패한 인생을 살던 내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치열하게 검열하게 된다.
가치, 명예, 칭찬, 대접과도 같은 ‘영광’의 단어들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인정을 그 누구보다 원하는 나면서 막상 그것들이 다가오면 주춤하고, 더 나아가서 내가 부족한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나의 좋고 긍정적인 부분을 마주할 땐 적당히 대하고 부정적이고 부족한 부분을 바라볼 때는 세밀하게 뜯어본다. 그러다 안 좋은 부분이 티클만큼이라도 나올 때면, ‘거봐. 넌 이렇게 볼품없는 인간이잖아.’ 라며 다그치게 된다.
그럼과 동시에 이토록 구질구질한 내가 이루어낸 초라한 성공을 잃을까 두렵다. 손에 드디어 틀어쥔 작은 성공. 이걸 기반으로 더욱 성장하는 내가 되어야 하는데, 이 것이 유일한 나의 업적이면 어쩌지,라는 공포감. 그러다 보니 나에게 다가오는 성취는 한편으로 상실이 되기도 한다.
이토록 볼품없는 나인데, 내가 무슨 삶에 미련이 있을까.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는 갤러리에 앉아 내 인생을 회고하다 보니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불쌍해졌다. 내 폐허도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씻겨 내려가면 좋을 텐데. 인생 전반에 걸쳐 새겨진 아픔이 쉬이 사라지진 않는 것 같다.
초라한 내 삶 속에서도 다행스러운 점은 있다. 인간관계에 대한 허기가 드디어 사라졌다는 것.
전시를 한다고 울산에서부터 서울까지 꽃다발 들고 달려오는 츄가 있고, 내가 길을 잃을 때 잡아주는 작업실 언니가 있고, 기꺼이 나를 위해 운전기사가 되어주는 호잇이 친구도 있다. 이 세 명이 든든하게 날 지켜봐 주니 사람들의 인정이 지지가 고파 괴로울 만큼 발버둥 치며 노력했던, 인간관계에 대한 미련이 드디어 끝이 났다.
서투르고 느리지만 조금씩 나는 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를 천천히 받아들이다 보면 나 스스로에게 하던 살인도 멈추게 되지 않을까. 종국엔 삶에 미련도 생기지 않을까.
언니, 이렇게 언니가 내 세계를 바꿔놨다. 엉망진창이던 내 삶에 한 줄기의 빛을 쏴주었다. 수많은 대화의 시간 속에서 언니는 내가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갈 때마다 ‘ㅇㅇㅇ! 거기 아니야! 들어가지 마!’를 외쳐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나는 나를 학대할 때도 있겠지만, 서서히 느리게 바뀌어볼게.
그러니 언니, 이런 엉망인 나를 당분간만 이해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