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늦여름에 다정한 이에게 끌리고 말았다.
“ㅇㅇ아, 너의 글 속에 나도 나오려나? 그렇게 네 작품에 내가 담기려나.”
“난 헤어진 사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데, 너를 주제로 삼으려면 너와의 인연이 끝이 나야 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묻던 너는 글을 취미로 쓰고 있고, 그 글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화한다는 나의 말에 네가 그 글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물어봤다. 내가 연애 대상자를 글감으로 삼을땐 이별 후 감정의 잔재가 남아 그것을 털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라 네가 내 뮤즈가 되는 순간은 헤어진 이후나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게 트리거 포인트가 되었나 보다. 지금 내가 이렇게 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으니.
우리는 그 어떤 시작도 하지 않았던 관계다. 많이 쳐줘봤자 내가 노력한다면 바뀔 수는 있었던 관계. 너도 나도 연애에 대해 열린 마음이긴 했지만 둘 다 서로에게 노력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데이트메이트인 채로 시간을 보내다 어느 순간 일방적으로 내 마음이 커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내 현생은 케케묵은지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피로했다.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너를 향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버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정작 너는 나에게 ’내 마음을 묶어두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잖아?‘ 라고 반문하더라도 할 말은 없고, ’그 정도뿐인 감정‘, 이라고 폄하당하더라도 상관없다. 현생에 지친 내가 이성을 대하는 태도는 딱 이 정도니까.
너는 다정한 내 모습만을 봐왔고, 갑작스럽게 끝을 말하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겠지. 널 향한 내 마음의 크기도 잘 모를 거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 사이에 ‘끝’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다.
나는 너를 정리할 거야.
우리는 정말 우연히 만났다. 쉬이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활자 속에서 만났으니까. 그 우연을 인연으로 묶은 것은 너였다. 서로 일하는 시간엔 카톡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퇴근 후에는 꽤 길게 통화했다. 그게 지속되다 늦은 밤에 만났다. 첫 만남이 어색하니 간단하게 술 한잔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편의점에서 4캔에 12000원짜리 맥주와 감자칩을 사 공원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남 여가 만나 할 이야기란 게 뻔했다. 이상형, 연애관, 스쳐 지나간 연애사. 뻔한 이야기를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서 무더운 여름밤 기승을 부리던 모기들에게 우리는 사이좋게 뜯겼다.
날렵한 눈썹, 큰 눈, 높은 코, 웃을 때 이쁘게 휘감기던 입꼬리, 낮은 목소리, 적당히 탄 피부, 꽤 큰 키에 슬림한 체형. 너의 외형을 찬찬히 뜯어보며 닮은 사람을 이야기했고, 너 역시 내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이쁘다며 칭찬을 했다. 이게 첫 만남이었다.
그 후 간간히 카톡을 주고받다 야식을 먹고 싶다는 너의 말에 함께 족발을 먹었다. 꼴랑 두 번째 만남일 뿐이었는데, 나는 네가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다. 너는 편안한 침묵 속에 우리를 던져두었고, 광대를 자처하더라도 타인을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나였지만 너와의 공백은 괜찮았다. 이야기가 끊기면 끊기는 대로 내버려 뒀고, 대화가 시작되면 적극적으로 토론했다. 그게 너무 좋았다. 침묵 속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 너와의 데이트가 끝난 후, 네가 보고 싶어 졌다.
’ 네가 궁금해. 자꾸 물어보고 싶어. 그래서 이제 그만 여자친구로서 너를 갖고 싶어.‘
이 감정이 들자마자 나는 너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든 순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관계를 노력해서 변화시키고 싶지 않았던 내가 너로부터 회피하는 것이 가장 편했다. 널 원해.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지 마. 이 뜻을 대신하는 카톡을 보낼 때 ‘보고 싶어.’ 라든가, ‘너랑 함께 하고 싶어.’라는 메시지를 보낼 뿐. 네가 나의 연락을 무시하면 무시한 채로 뒀다. 내가 너를 버리기로 결심했으니까 아무렴 어떨까. 그걸 반복하다 보니 우리의 연락은 미비해졌고, 나는 그것으로 너를 끝낸 사람 같아 족했다. 이렇게 너로부터 해방됐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에 너의 연락이 왔다. 소개팅이 들어왔다고 했다. 어린 여자라고 했고. 할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래, 받아. “
라고 했다. 막상 너로부터 다른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니 괜찮지 않았다. 너로부터 도망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내 마음속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그러나 소개팅을 받지 말라고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엉망인 채로 흘려보낼 내 마음을 너에게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진 않았지만 순간의 치기 어린 마음으로,
“난 너에게 호감이 있어.”
라고 말했다. 너는 읽고 씹었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볼품없는 감정에 대한 결과를 기어코 확인했다.
그 후 너에 대한 모든 걸 차단했다. 카톡, 전화, 문자, 모두.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물어보면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갖겠노라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했다.
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이틀 동안 꽤나 아팠다. 나는 몸과 마음이 일체화된 사람이어서 마음에 스산한 기운이 돌면 온몸에 근육통이 심각하게 온다. 끙끙거리다 보니 널 향한 감정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널 다 비워냈다고 생각하니 거짓말처럼 몸이 돌아왔다.
너랑 하기로 했던 것들이 많았는데.
함께 술에 진탕 취해보자고도 했고, 함께 한강에 소풍을 나가자고 했으며,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는 나의 말에 함께 보자고 했었다.
’함께.‘
그저 말 뿐이었던 거지만, 함께하자는 너의 다정함에 속수무책으로 끌렸다.
너와 만났던 늦여름이 끝이 나고 가을이 왔다. 이렇게 하늘이 청명한 날씨에 널 떠올리던 예전과 달리 난 널 떠올리지 않는다.
그래, 이렇게 찰나에 접어질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