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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Oct 09. 2020

18일간의 연인

나는 적당한 마음으론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사람이더라.

우리는 글 쓰는 동아리를 통해 만났다.


네가 나에게 건네었던 첫인사. 네가 수줍은 얼굴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연락처를 물어보는 거예요.' 라며 내 연락처를 물어봤던 것. 그리고 너와 주고받았던 첫 연락. 나는 너와 '처음' 주고받았던 것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술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이다 보니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뿐인지라 소위 말하는 '또라이'들이 모여있던 곳에서 차분하게 있던 내가 눈에 띄었나 보다.

그렇게 내 연락처를 얻은 너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그 적극성을 나는 적당히 받아들였다.


너와의 첫 만남은 재미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 글 쓰는 동아리에서 만났지만 글에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이상형, 연애 스타일, 꿈, 희망,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너나 나나 둘 다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내 멋대로 그렇게 착각했거나.


급하게 발전되는 관계에 상처 받은 전적이 있었던 나는 너와의 관계를 천천히 발전시키고 싶었다. 섣불리 연애를 시작해서 상처 받고 싶지 않았다. 너와 10번 정도는 만나보고 관계 설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는 나에 비해서 급했다. 정확하게 나에 비해 10배는 급했던 것 같다.


옛 경험으로부터 상처가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의 벽이 있기 마련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너를 슬쩍슬쩍 밀어내는 나에게 내가 너무 좋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 그리고 본인을 향한 내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진솔하게 해서, 그의 진솔함에 바보같이 무너진 나는 그 사탕발린 말에 적당히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됐다.


여자 친구가 생긴 거냐며 좋아하는 모습이 앳되고 귀여워 보여서 빙그레 웃었다. 내가 본인의 여자 친구가 된 것이 믿기지 않는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순수해 보여서 나 또한 '적어도 이 관계에 책임감은 가지겠다.', 다짐했다.

나의 다짐과 별개로 우리의 관계는 18일짜리였다.

넌 그런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나와 사귀는 첫 주, 너는 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일하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을 했고,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전화도 자주 하고. 내가 보고 싶다며 차로 날 데리러 오곤 했다. 그 상냥함이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널 만날 때 늘, “고마워.”라는 말을 했다. 고마웠던 너를 향해 거짓 섞인, "좋아해."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차마 그 말은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적당한 마음으로 너를 대하는 날들을 반복하던, 어느 날. 네가 날 너희 집으로 초대했다.

초대를 받고 한참을 고민하다 너희 집에 갔다. 가지 말자보다 '뭐 어때, 가자!' 하는 생각이 이겼던 거다. 네 집에 빈 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조그마한 선물도 샀다.


내 집과 비슷한 색감으로 꾸며져 있던 너의 집. 그래서 그런지 네 공간이 어색하지가 않았다.

말린 꽃다발들이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었다. 너의 섬세함을 알 수 있었다.

내 취향의 책으로 가득 꽂혀 있던 책장. 이래서 둘 다 섬세한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소통을 하는 것이었구나, 느꼈다.

네 취향의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빵빵하게 튼 채로 너는 네 볼일을 봤고 나는 네 책을 한 참 읽었다.

책의 제목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마음에 와 닿는 글귀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내버려 둔 채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분명 너의 집이 어색하진 않았는데, 나는 그냥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너와 너만의 공간에서 단 둘이 있다는 것이 불편했다. 연인이긴 하지만, 너의 영역에 날 끌어들이는 네가, 나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네가, 나의 영역에 발을 넣으려는 네가, 자꾸만 불편해져서 그날의 나는 웃으면서 널 버렸다.


그날의 나를 눈치챈 건지 아니면 너의 속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던 건지 그 날 이후 너의 태도는 변했다. 늘 나와 붙어있길 바랐던 너는, 언제부턴가 약속이 있다고 했었다. 상대에 향한 마음이 적당하든 과하든 상관없이 연인의 말을 잘 의심하지 않는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이 뒤는 다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뻔한 결말.


너는 그 뒤로 연락이 안 됐다. 하루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날, “많이 바빠?”라는 내 카톡에 한참 뒤에야, “응. 많이 바쁘네.”라는 답변이 왔다.

남자들이 연락이 안 되는 순간은 상중, 병중, 아웃 오브 안중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듯 나는 ‘그’ 바쁘다는 핑계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너의 카톡을 씹었다. 그러니 너에게서도 더 이상 연락이 오질 않았다.


모르겠다. 네 태도가 왜 갑자기 변했는지.

웃으면서 널 버린 그 날의 나를 눈치챈 거였는지, 널 향한 내 마음이 그저 그렇다는 걸 눈치챈 거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거였는지. 근데, 네가 나에 대한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하루 종일 바빠 연락을 못했다면, 자기 전에 나에게 일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카톡이나 전화를 해서 말을 했겠지.


“나 회사에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카톡을 못했어. 지금 너무 피곤한데 자기 직전에 잠시 연락해. 내가 내일 다시 연락할게.”


라고.

내 마음이 작은 크기든 적당한 크기든 연인이 된 이상 난 저 말 한마디면 너의 바쁨을 다 이해할 수 있었는데, 하루 중 저 일분을 넌 나에게 투자하지 않은 거고, 나는 이 것이 너의 '나를 향한 마음'이라고 받아들였다.


왜 내가 먼저 너에게 매달리지 않았느냐고 항변한다면, 글쎄. 나는 적당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사람이더라. 일단 너와 연인으로서 시작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내 결정에 책임지려고 나름의 노력은 했는데 그 이상은 되질 않았어. 그래서, 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에게 하루 중 일분도 투자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너에게 전화해서 지금 나랑 뭐 하는 거냐고 어쩌고 싶은 거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에너지도 없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지만, 너에게 그만큼의 애정도 없었다.


18일간의 연애.

이렇게 끝난 관계가 서럽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렇진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의 결과이니 나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하루 넘게 잠수를 탔던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만남과 이런 식의 끝맺음이 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서 이 과정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어찌나 다행인지.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너의 집에 두고 온, 내가 아끼고 아끼던, 친구에게 선물 받은 귀걸이를 두 번 다시 착용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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