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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Oct 07. 2020

강렬한 태양 같았던 너

그리고 바보처럼 눈이 먼 것은 내 쪽

본가에서 지내면서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리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던 스트레스에 나는 불안정한 수면 양상-극단적인 불면증 혹은 기면증-에 시달렸고, 식사 때마다 입 안에 넣은 밥 알갱이들이 서걱거려 토하러 화장실로 뛰쳐나가는 것을 반복하는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할 수 있는 일들을 치열하게 고민하느라 때로는 절규하듯 울었다.


내 일 때문에 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볼썽사납게 울부짖는 내 모습이 나 자신도 어색하였지만, 엉엉 울다 보니 카타르시스가 느껴졌고 스트레스가 해소된 기분도 들었다. 혹은 스트레스가 해소되었다고 착각했거나.


며칠을 이렇게 망가진채로 보내다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10년 넘게 써왔던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렸다. 너에게 상처 받을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모든 걸 차단하고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야 해, 라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원래 쓰던 핸드폰 끝자리는 인기가 너무 많아서 해당 숫자를 유지하며 다른 번호로 바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계획과는 달리 새 핸드폰 번호는 통으로 바뀌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날짜를 모티브 삼아 만든 내 새 핸드폰 번호.


이렇게 번호를 바꾸는 것으로 나는 너를 단절하고 겨우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방관하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뒀다면, 나는 그대로 너에게 꼬꾸라져 심연 속에 가라앉아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을지도. 내가 이렇게 너를 생각한다는 것을 너는 몰랐을지도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너로부터 겨우겨우 도피한 채로 감정의 파도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다정한 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시간만 나랑 놀아줘."


그의 말에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겨우 기어 나와 현관으로 내려갔더니 차를 끌고 온 그가,


"바다 보러 가자."


라며 나를 이끌었다.

다정한 이와 함께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음악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그가 좋아하는 음악도.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음악을 블루투스 마이크를 쥐고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바다가 보였다.


다정한 이와 바다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시원한 파도, 시원한 하늘, 파란색, 쨍한 태양빛을 보니 내 마음이 어느 정도 뚫리는 듯했다. 아니다, 모든 걸 집어삼키는 듯 휘몰아치는 파도를 보다 보니 왜 사람들이 파도에 홀려 그대로 바다에 침잠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파도에 홀리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아"


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그는 응답이라도 하 듯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보았다.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너를 떠올렸다.

너의 조근조근한 목소리, 단정한 말투, 씩 올라가는 입꼬리.

왜 자꾸만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떠올라서 나를 이토록 헤집어대는 것일까.


도망치고 싶어도 자꾸만 그날 밤의 장면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밀려들고 쓸려내려 가는 파도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널 버린 줄 알았는데 내가 네게 버림받은 것이었다. 그래, 이제는 별 수 없이 인정해야겠다.


바다를 파도를, 그리고 그 위에 강렬하게 떠오른 태양을 보면서 이렇게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건 참 오랜만이다. 그러니, 당분간 너를 이유 없이 그리워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그러면서 때때로 네가 있을 곳을 나 홀로 맴돌며 우연이라도 너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서로의 눈이 다시 마주칠 수 있게 되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며.


어둠 속의 달을 좋아하던 사람이 강렬한 태양에 매혹되면 눈이 멀기 마련이다.

그리고 바보처럼 눈이 먼 건 내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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