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억해 주기를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토로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남들은 공감 못할 특이한 공통분모가 있다 보니 첫 통화조차 새벽 여섯 시까지 이어졌다. 그 뒤의 연락도 끊임없었다. 무수한 텍스트를 주고받는 동안 나보다 연하였던 너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다정하게 ㅇㅇ아,라고.
그게 싫지 않았다.
먼저 보자고 한 건 너였다. 마감에 치여 한창 바빴지만 보고 싶은 마음에 시간을 조율해서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집 근처 곱창집. 그는 늦게까지 일을 하고 약속 장소로 왔다. 만난 시간은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대였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먹으며 술도 같이 마셨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전화로 했던 대화도 다시 나눴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너의 고백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넌 무척 잘했다.
내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줬고,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전화했다. 한번 통화하면 기본 20분 했던 것 같다. 나누었던 수다가 참 맛있어서 통화를 끊을 때 내심 아쉽기도 했다. 데이트할 때 반주를 하며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봤다. 그러며 생각을 나눴다. 또, 읽었던 소설 감상평을 주고받으며 심도 있는 토론도 했다.
언젠가, ‘고백은 꽃다발을 받으며 받고 싶어.’라는 나의 말에 서프라이즈로 해바라기 꽃다발을 선물했다.
꽃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숭배, 기다림. 꽃말을 알고서 선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녹여낸 마음이 좋았다.
‘ㅇㅇ, 삶이 꽃이 되는 순간’
쪽지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진 수줍은 고백, ‘사랑해.’
나는 장난스럽게 ‘다시 이야기해 봐, 제대로 듣고 싶어!’ 라며 매달렸고, 너는 ‘못 들었으면 됐어.’라고 고개를 돌렸지만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해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달콤한 시간은 여기까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균열이 미세하게 생겼다. 너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잘해준 것들을 떠올리며 예민함을 눌렀다. 바쁘니까 그럴 수 있어, 이해했다. 그 시간들이 괴롭고 힘들었지만 이 바쁨이 끝나면 달콤한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유기에 대한 공포를 숨겼다.
몰랐을 것이다. 전화에도 메시지에도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전화가 오면 해사하게 웃으며 대화를 했고, 메시지에 부정적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괴로움과 고통의 시간을 3주간 버티며 나는 많이 피폐했다. 속에 있는 감정을 들키지 않기위해. 물 밑에서 미친 듯이 물장구를 치면서 물 위에서는 고고함을 잃지 않는 백조와 같은 모습으로 네 앞에서는 괜찮다는 듯,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러다 관계 종료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면 술에 취한 채로 잠에 들었다.
그렇게 서로의 속내를 말하지 않는 나날들이 이어졌고, 더 이상 이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너에게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네가 늘 내가 있는 곳으로 왔으니 이번에는 내가 가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지도 몰라.’는 생각에 하던 일을 멈추고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이 선택이 다가올 불행을 앞당긴다고 할지라도 너의 앞에서 초라하고 싶진 않아 신경 써서 화장을 하고, 머리도 잘 매만졌다. 옷도 여성스럽고 단아하게 입고, 힐도 신었다.
스텔레토힐 특유의 소리를 내며 택시에 올라탔다. 이 관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느라 쌓인 피로에 의해 몸이 녹아내렸다. 쓰러지듯 좌석에 앉아 반도네온 곡을 들었다.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음색. 나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괴로워,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회피하면 안 돼. 버텨야 해. 그래야 이 관계에 미련두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
택시 안에서 너의 회사로 가는 동안 창 밖을 바라봤다.
언젠가 함께 전시했던 작가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야경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작가는 서울의 야경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며 동화처럼 말간 색채를 쓰던데, 이상하지. 나는 늘 고독하고 외롭고 퍼석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는 무수한 빛들. 창문에 톡톡 부딪히며 부서져가는 약한 빗방울들이 야경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게 했다. 그 장면이 명확하지 않은 애정관계에 취약해 무너지고 있는 나 같았다.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퇴근 후에 편하게 나와.’
그 후 주고받은 메시지. 결론, 날 사랑했던 이는 이제 없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택시를 타면서 나는 끝을 고했고, 너는 미안해.라고 했다.
3주간 치열하게 고민하며 몸과 마음이 아팠던 것도 확실한 끝 앞에서 서서히 나아져갔다. 집에 오자마자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찢어 버렸다. 사진, 쪽지, 그리고 명함. 내 입장에선 최선을 다했으니 미련도 없었다. 미안해, 로 우리는 이별한 줄 알았는데 한참 뒤에 너에게 받은 메시지.
‘약속했던 그날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헤어지자는 말 뒤에 받은, 의도를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본 후 난 너를 차단했다. 이별했다는 것을 핑계로 술을 진탕 마시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던 것일까.
이별을 기어코 맞이했으니 어쩔 수 없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끝이 난 관계 앞에서 난 해갈된 사람.
⌜그거 알아? 나는 너랑 꽤 오랜 시간 동안 평온하게 연애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는 내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잖아.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들을 나에게 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널 믿기로 했는데. 사랑과 믿음을 줬다 뺏은 건 나빴어.⌟
그 후 너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두드리며 추억을 떠올렸다. 좋았던 시간부터 태도가 변한 지점까지. 그러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
결혼을 염두한 연애를 하고 싶어 했던 너. 결혼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보였던 나. 그다음 날부터 바뀌었던 너의 태도. 저 말이 태도가 변한 것의 원인인 것이라면. 그간 이해되지 않았던 너가, 마지막 메시지가 납득 갔다. 어쩌면 우리는 이별을 맞이하지 않고 대화로 해결해 볼 수 있는 거 아니었을까.
이 생각이 미치자 행동으로 옮겼다. 차단을 풀고, 메시지를 보냈다.
‘생각해 봤는데 대화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대화를 못한 게 마음에 걸리네. 대화를 좀 해봤으면 싶어. 만나서. 연락 줘.’
너는 이내 읽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기다렸다. 흐르는 시간 속에 기대도, 감정도, 미움도, 원망도, 조바심도 흘려보냈다. 우리의 문제가 애정의 문제였을 수 있겠지만 가치관의 문제였을 수 있다. 그 건 해결될 수, 아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이렇게 끝이 나고 마는구나.
이제는 인정해야지. 너는 노력하고 싶을만큼 사랑한 게 아니었다는 걸. 나에게 줬던 감정은 찰나의 호감일 뿐이었을 뿐, 발걸음을 멈추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을. 내 발걸음을 무르지 않았는데. 여전히 한 발짝이라도 내딛고 있었는데. 이렇게 뒷걸음질 치듯 떠나야 하는구나.
그러나 너를 찾아간 것을, 한번 더 손 내밀어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좋아했던 내 마음에 대한 행동이었고, 이 관계를 기존대로 쉽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널 좋아했다.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러니 평소답지 않게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거다.
이번만큼은 찰나에 쉬이 접히지 않을 감정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기에 당분간 이별 속에 머무를 것 같다. 때로는 이별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복하게 지내기도, 상투적일 만큼 이별에 지독하게 아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너를, 우리를 추억하지 않을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그러니,
G에게.
잘 지내. 짧게나마 사랑받았던 건 참 행복했어.
널 미워하는 마음도 다 버렸으니까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면 훌훌 털고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
이젠 음습한 미련 속에 우리를 가둬두지 않을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