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추억팔이
오늘은 연휴 마지막 날인데다 비까지 내려 가게가 종일 조용했다.
가만히 이런 저런 옛날 생각들을 하다가
스물 여섯 혼란스러웠고 한 없이 작아졌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졸업 후 마음에 없던 회사를 다니다 관두고 다시 글쓰는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던 때 였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낮으로 뭔가를 써대던 시기 였지만 대체 뭘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시기였고 그 답답함 만큼 내 인생만 안풀리는 것 같은 괜한 억울함에 차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내 억울함의 중심에는 카페 맞은 편 건물에 걸려있던 거대한 현수막이 있었다. 삼성카메라를 목에 건 배우 이제훈의 사진이 담긴 광고 현수막이었다.
배우 이제훈.
돌이켜 생각하면 꿈처럼 느껴지지만 그는 스물 두 살 내가 처음 찍은 단편영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때의 그는 성실하고 다정한 배우 지망생이었고 나는 단편영화 연출이랍시고 콧대만 높았지 뭘 모르던 영화영상학과 2학년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
내가 스물 여섯이 되었을 때 그는 끈질기게 자기 갈 길을 걸어 꿈꾸던 배우가 되어 있었고 나는 꿈을 놓지도 잡지도 못한 채, 수 없이 갈팡질팡하는 카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 현실이 억울했고 성공한 그와 불안한 나의 간격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밤 새 끄적였으나 한 줄도 마음에 들지 않는 습작노트를 끼고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목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 할 때 마다 '나는 왜 그처럼 한 길로 가지못했나' 하는 자격지심에 괜히 울컥했다. 애써 그 현수막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면서 성공하기 전엔 그가 나온 어떤 영화도 보지 않으리라 결심까지 했었던 참 못난 시절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난 그때의 어린 다짐과는 달리 글쓰는 일을 밥벌이 삼지도 '그' 보다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그가 나온 영화를 이제는 볼 수 있겠다 싶을 정도의 마음의 평정심을 찾았고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건축학개론'을 보았다.
영화는 섬세했고 영화 속의 그는 참 연기를 잘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기가 주제 넘지만 멋지게 그 역할을 연기해내는 그가 참 대견했다.
그렇게 오랜시간을 돌아 그의 영화를 보고, 성공한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 하고 나서야 나는 나름으로 성실히 살아 온 나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고민하고 헤매고 좌절하고 그리고 다시
희망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서른 하고도 하나인 지금도 여전히 이십 대 그때처럼 섬세하고도 섬세해 예민하기까지한 감성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 시절 보다 조금은 성장했다고 느끼는 것은 이제는 그 예민한 감성의 허우적거림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평정심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졌다는 점이다.
이제 남은 9년을 채워 나갈 나의 삼십 대는 앞으로의 날들을 가장 나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할 초석을 만들어 가는 단단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