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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Oct 01. 2015

남기고 온 박스 하나

꺼낼수록 빠져드는 추억쓰나미

추석을 맞아 내 고향 부산에 다녀왔다.

가족들의 환대는 기대를 거스르는 법 없이 따뜻했다.


그러나


가족 말고도 나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묵은 나의 물건들로 가득 찬 박스 하나 였다.


엄마가 장가가는 동생 방을 정리하면서 덩달아 부산에 묵혀 둔 내 물건들도 정리해서 넣어 둔 것이었는데 확인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갈 건 챙기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이걸 열면 온갖 추억들의 쓰나미에 휩쓸릴 걸 예감했다. 모른 척 그냥 둘까 잠깐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박스를 열었다.


박스 속엔 오래 된 일기장, 여중생 때 쓰던 교환일기, 초등학교때 부터 받은 편지들, 여고시절부터 샀던 CD, 대학시절 처음 찍었던 단편영화 6mm 테잎 원본과 콘티북, 그리고 촌스러운 사진들까지 나의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기록들이 모두 있었다.



추억쓰나미의 시작은 사진이었다.

스무살의 내가 내 나이 보다 조금 더 들어보였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보다 그때가 더 나이들어 보였을 줄은 몰랐다. 베이비 펌이 유행이던 시절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왠 고모님이 거기 계실 줄이야. 지금이 용 된 거 였다.


그렇게 시작 된 일기와 편지 되새김질.


하나 둘씩 들춰 본 일기들은 정.말.로. 오그라듬 이라는 단어말고는 표현 할 방법이 없을만큼 오그라들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 감정들에 당시에는 왜 그렇게 심각하고 진지했는지, 난 어릴 때나 지금이나 일관성있게 진지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돌려썼던 교환일기와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다가 지금까지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해왔던 기억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확인하고 깜짝놀랐다.

초등학교 때 나 혼자 짝사랑했다고 기억하고 있던 남자애에게 받은 편지엔 '니가 준 인형을 가방에 달고 다닐게'라는 내용이 있었고(나만 좋아한 줄로만 알았더니 걔도 날 좋아했었나 보았다>.<) 중학교 시절 친구와 주고 받던 교환일기엔 친구를 향한 다정한표현이 넘쳤다. (그걸 다시 펼쳐보기 전 까지 나는 내가 그 친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교환일기를 쓰다가 말았다고 생각해왔었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과거의 기억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은 내가 편집하고 과장해서 만들어놓은 것은 아닌지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던 강신주의 말이 사실이었다.



최신형 슬라이드라고 좋아했던 휴대폰과 칸칸이 빼곡하도록 바쁘게 살았던 대학시절의 다이어리까지.


해묵은 물건들 속에 나도 잊고 있던 내가 있었다.



스물하나를 '벌써' 라고 말하던 네가 있었고

사랑한다는 것이 뭔지 고민하던 내가 있었다.


CD와 책들을 서울에 가져갈 캐리어에 담아 놓고 방으로 돌아와서 고이 다시 덮어 둔 일기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부산에 두기로했다.


잊고 지내다가 언젠가 다시 펼쳐보게 될 날을 기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번에 부산에 갈 때는 지금 쓰는 다이어리를 챙겨가서 그 속에 슬쩍 섞어 둬야겠구나 싶었다.


그것을 펼쳐보게 될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내 모습을 흡족하게 떠올리기를 기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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