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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토타입L Dec 31. 2017

하나씩만 이어지는 삶을 받아들이는 근엄함에 관해

年記2017 생각해보았다

새해가 들이닥친다. 하아. 잠시 묵념.




<되새김>


성성한 흰머리를 감추는 염색을 그만둔지 꼭 1년. 물론 염색모가 나이에 맞고 단정해 보이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머리를 쓸어내릴 때 빠지는 몇 가닥 중 흰머리가 섞여 나올 지경이 되니 염색이 부자연스런 일로 느껴진다 - 그 일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다지만. 검은머리 빽빽한 또래가 가끔 부럽기도 한데, 대신 어른으로서의 근엄함을 얻었다(고 치자). 근엄한 어른이 사사롭게 검은물은 무슨..


엄마는 초딩인 내게 순리대로 하라, 순리대로 된다는 말을 즐겨하셨다. 10대 쯤 되어 그 순리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조금 알게 되고서 참으로 고루하며 무기력한 단어라고 치부한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과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한껏 노력해보기도 한다. 노력은 노력대로 하는 것이지만, 안되는 것은 역시 안되는 것이다.


내 머리는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했다. 흰머리가 검게 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흰머리를 검게 물들여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흰머리가 검은머리를 밀어냈다. 지금 보기에 이것이 순리인 것 같다.



<숙제>


중랑천 근처 반지하방에 살던 때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10분. 한겨울 퇴근길 찬바람 속으로 걸어올라오는데 갑자기 마음이 뿌듯해졌다. 곧 집이다. 찬바람 맞는건 10분을 넘지 않을 것이란 확신 때문에.


3층 주택 꼭대기에 있던 전망 좋은 집. 거긴 문을 꼭 잠그고 보일러를 올려도 집 안의 공기가 데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에 누우면 이마와 코끝이 시렸지만 이불 속 만큼은 참 따뜻했다.


창도 문도 없던 먼 곳의 그 집은 무더운 낮을 보낸 밤 누우면, 따뜻한 바람이 마주한 두 벽면의 커다란 구멍으로 드나들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바람이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많은 집들..


오늘 밤 머리 둘 곳이 있다는 것, 내 몸을 녹일 곳이 어딘지 안다는 것은 얼마나 특혜인가. 이렇게 따뜻한 집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싸늘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걸까.


한편으론, 흐르는 시간 속에서 여러 장소를 거쳐오며 나 자신을 온전히 데리고 온 것이 맞을까 하고 의심한다. 문득 문득 내가 100%가 아닌 것 같단 느낌이 든다.



<소망>


대낮에 소매치기를 두 번 당하고, 아시안 여성이란 이유로 길거리 놀림이 일상이 되고, 테러 소식을 근거리서 접하다 보니, 작은 몸을 한껏 더 움츠린채 다니고 있더라.


다시 어깨를 펴자. 근엄함이 더욱 돋보이도록. 이 근엄함을 토대로 가장 무력한 자리에서도 묵묵히 하루 하루를 지어나가길 소망한다.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는 것에 인색하지 말자. 누구한테나.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고 따뜻한 이불처럼 따뜻한 한 마디를 하자. 시작하고 끝내는 것, 넘어뜨리고 일으키는 것 모두 한 마디였다. 한 마디를 더하거나 참는 일에는 그토록 신중함이 필요한 것이고, 근엄한 어른이라면 늘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이렇듯 하나 하나 이어지는 삶에 익숙해지고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불어 당신의 소망이 하나 하나 이루어지길☝️




염색 안 하냐고 여전히 묻는 사람에게, "헤어칼라 이즈 낫 임폴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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