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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y 10. 2018

작가들의 도시, 더블린(Dublin)

in Ireland

  자, 여기 지금 비행기 티켓이 한 장 있다. 보시다시피 목적지는 비어 있다. 당신이 빈 칸에 가고 싶은 도시를 적으면 그 티켓은 바로 당신 것이 된다. 당신은 어떤 도시를 꼽을 것인가. 단 한 도시다.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아일랜드(Ireland), 라고 적을 것이다. 적을 것이다, 라고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아일랜드보다 날씨 좋고 음식 맛있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도시는 참 많은데 하필 그곳이냐? 그러나 어쩌랴, 그저 좋은데. 아일랜드는 2014년에 머물렀더랬다.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건 그리움이 절반이다. 그 땐 가을이었다. 하필 가을이라니.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11월. 화양연화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계절. 확 피어나 열매를 맺고 그 열매 끝에 죽음을 준비하는 계절. 그 11월에 나는 아일랜드 더블린을 살았다. 결정적 시기가 결정적 배경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더블린을 가겠다고 간절히 원했던 건 아니다. 그냥 우연히 어느 후미진 동네 한 구석에서 더블린이라는 펍을 보았고 그 펍을 가고 싶었을 때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때 왠지 그냥 더블린에 가고 싶기는 했다. 더블린, 이라는 발음에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만나 전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는 잊고 지냈다.     

그 유명한 더블린 시내 템플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일랜드 더블린에 갈 수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갈 운명인 냥 잊고 지냈던 것들이 순서 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니스프리가 그랬고 예이츠가 그랬고 기네스가 떠올랐다. 사무엘 베케트가 그랬고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나 율리시즈가 생각났다. 문을 닫은 더블린이라는 펍의 이미지가 솟아나더니 갑자기 U2가 생각나기도 했다. 나는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더블리너와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를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착각은 부푼 꿈을 꾸며 더블린에 도착케 했다.


  나는 더블린에서 6주 가량 살았다. 6주는 길거나 혹은 짧은 시간이다. 살기 전에는 길다 생각되었고, 살고 나서는 짧다 생각되었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순간에는 지독히 짧은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았고, 지금 돌이켜보면 추억을 쌓기에는 다행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느 한 도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얼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적어도 2주 이상은 필요했다. 한 달이면 더 좋겠고 일 년이면 더 좋겠지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노력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뭐라 할까. 머무르는 여행에 충만함을 가지고 현지인처럼 지내는 익숙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금의 삶을 내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정된 직업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지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사회가 정한 고정관념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하고 누적된 인간관계를 개의치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의식의 도약이 있어야 한다. 낯섦을 사랑해야 한다. 떠나서 머무르고 또 떠나는 여행을 지독히 좋아해야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다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아니한다. 그런데도 난 동경한다.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시내에는 엘리자베스 1세가 1592년에 설립한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가 있다. 1592년은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가 아니던가. 참 오래되긴 했다. 트리니티 칼리지가 유명한 이유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대학이라는 점, 유럽 내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대학이라는 점, 대학 내에 8세기의 복음서 사본인 켈스의 서(Book of Kells)가 소장된 오래된 도서관이 있다는 점 등이 있지만 내가 트리니티 칼리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대학을 나온 많은 작가들로부터 받은 영감 때문이다. 사무엘 베케트, 윌리엄 B.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브램 스토커, 조너던 스위프트 등이 트리니티 출신들이다.     


  한 도시를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유명한 곳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음식으로 옮아갔다고 나중에는 현지 사람들과의 소통을 추구한다. 쇼핑이나 기념품 사기는 그 중간 어디쯤에 끼어들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인 방식의 여행 즐기기 대신에 처음부터 아예 이것들을 동시에 해보면 어떨까. 즉 트리니티 칼리지를 보고 기네스를 마시면서 현지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해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여행 초짜인데. 영어를 못 하는데. 낯을 가리는데. 그렇다.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과 미리 대화를 나누어 보는 건 어떨까. 여행하기 전, 더블린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 곳 출신의 유명한 작가들의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더블린이라는 도시,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가슴으로 확 와 닿을 것이다. 비단 여기만 아니다. 모든 도시가 모든 나라가 그렇다. 미리 공부하고 가면 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라는 불세출의 부조리극을 남긴 극작가다. 두 남자가 막연히 고도를 기다리며 극이 시작되고 고도를 기다리며 극이 끝난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도 우리는 고도가 생각난다.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숙명 아닐까. 우리에겐 저마다의 고도가 있고 저마다의 기다림이 있으니깐. 이 극은 우리나라에서도 수십차례 공연되었고 트리니티 칼리지 캠퍼스 내에 그의 이름을 딴 극장도 볼 수 있다. 나는 그곳에서 아마추어 대학생들의 극을 두 편 보았는데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마음은 벅찼다. 사무엘 베케트의 아우라 때문이어서일까. 움푹 패인 그의 이마 주름을 보면 그렇게 늙고 싶어진다. 주름으로부터 읽혀지는 그의 자존심은 꼬장꼬장한 노인을 넘어서서 철학적 사유를 던져준다.     


  윌리엄 B. 예이츠(W. B. Yeats)는 『이니스프리의 호수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을 쓴 시인이다. 그는 수많은 시를 썼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영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도 사무엘 베케트처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더블린국립도서관에 가보면 예이츠 전시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예이츠를 시식할 수 있다. 제대로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몇 시간 차를 타고 더블린 북부 슬라이고(Sligo)라는 도시에 가야 한다. 내가 그곳에 간 이유도 온전히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벤불벤 산 아래에는 그의 작은 무덤이 있는데 - 사실 무덤이 클 필요가 어디 있던가 - 묘지명이 기막히다. Cast a cold Eye / On Life on Death / Horseman pass by. 번역해보면, 차가운 시선을 던져라 / 삶과 죽음에 대해 / 말 탄 자여 지나가라. 멋지지 아니한가. 바빠서 빨리 지나가야 하는 자는 그 무덤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니 그냥 지나가는 게 맞다. 여유를 가지고 걷는 사람들은 그곳에 서서 예이츠와 대면할 수 있으리라. 차가운 시선이 아닌 뜨거운 심장으로. 그곳까지 갔으면 이니스프리 호수섬도 보아야 할 것이다. 작지만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곳. 그의 시가 호수섬 위로 둥둥 떠오르는 듯 착각이 든다. 이제 이니스프리 하면 화장품 브랜드만 떠올리지 말고 예이츠라는 시인을 떠올려보시길. 예이츠 때문에 이니스프리 로션을 바르는 엉뚱함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예술지상주의를 논한 작가로서 동성애자 관련 재판에 연루되어 2년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동을 위한 동화 『행복한 왕자』그리고 많은 단편들을 썼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은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라는 작품이다. 책을 읽다보면 왠지 도리언이 오스카 와일드일수도 있겠구나, 하고 착각이 든다. 인간의 본질과 선과 악의 문제, 쾌락적인 삶을 잘 녹여낸 이 작품 하나만 읽어도 여행 중에 만난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예술을 위한 예술’정신을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가와 동상은 더블린 시내 메리언 스퀘어 근처에 있다. 그리고 우연히 나는 런던 시내에서도 누워있는 그를 마주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포즈는 대개 거만하고 섹시하다. 패션도 파격이다.     

오스카 와일드 동상

  그 외 시간이 되시면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Dracula)』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도 읽어보시길 바란다. 참고로 조나단 스위프트의 무덤은 더블린 세인트패트릭 성당 안에 있다. 나는 작가들의 흔적을 찾아다닐 때 무덤에도 관심이 꽤 많은 편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마지막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은 누구에게나 처연하고 아름답다. 그 삶의 마지막 자취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산스러운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편안해진다. 다 저리 되는 것이다. 성당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함께 있듯이 우리도 저들처럼 항상 죽음을 공유하는 게 아닐까.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서의 조나단 스위프트 무덤

  끝으로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은 아니지만 더블린에 가기 전에 꼭 책으로 만나보고 떠나야할 작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그의 흔적은 더블린 시내 또는 근교 곳곳에 있다. 그래프턴 스트리트 근처에 그가 자주 들렀던 펍, 데이비 번스(Davy Byrne's)가 있고 오코넬 스트리트 근처에도 그의 기념관 및 동상이 서 있고 근교 샌디코브에도 그의 박물관이 있다. 그의 책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이나 『율리시즈(Ulysses)』를 읽으면 당시 더블린의 시대 상황과 문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은 얼룩덜룩하고 우중충충한 회색빛 도시. 거기에다 비를 더해야하는 도시. 가난한 사람들. 그 도시를 사랑하려면 그런 삼류 느낌나는 빈티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조금만 책 속으로 눈을 파묻으면 더블린에 푹 빠져들지도 모르겠다. 아 참, 또 한 곳이 있다. 혹시 크로아티아 풀라(Pula)에 갈 기회가 있으면 거기에도 그의 흔적이 있다. 작가 중심 여행은 그래서 재미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자주 들렀던 펍, 데이비 번스
오코넬 스트리트의 제임스 조이스 동상

  사족을 덧붙인다. 영화 <원스>, <P.S 아이 러브 유>는 꼭 보고 가자. 더블린 시내 혹은 근교에서 영화 배경지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반가움이란, 그 우연한 필연이란.     


  뱀발 하나 더. 더블린 시내에는 작가박물관도 있다. 흔치 않는 박물관이다. 그곳에 들르면 아일랜드를 빛낸 작가들을 종합선물세트로 만날 수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유물이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다보면 마리 열팬이 된 기분이다. 과연 더블린은 작가들의 도시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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