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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y 27. 2018

하이디를 찾아가는 길, 마이엔펠트(Maienfeld)

in Switzerland

  알프스 하면 어떤 나라가 습관적으로 떠오르는가? 그렇다. 스위스다. 그렇지만 알프스를 공유하는 나라는 의외로 많다.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들 입장에서는 살짝 억울한 감도 없지 않다. 내 것일 수도 있는데 늘 남의 것으로만 불리어진다면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이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알프스 하면 스위스를 먼저 떠올릴까. 가지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린 시절에 호기심 가득 시청했던‘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TV 만화영화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당시 스위스로 들어가는 감성적 관문은 하이디라는 여자아이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졌다.    

 

하이디 마을로 가기 전의 호텔이 있는 입구

  『하이디(Heidi)』는 스위스 작가 요한나 슈피리가 1880년에 쓴 소설이다. 이 정도면 고전이다. 이 책은 1965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영화로 만들어졌고, 1974년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다카하타 이사오에 의해 알프스 소녀 하이디로 재탄생했다. 우리가 본 만화영화는 이 일본 영화를 수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초록으로 넘쳐나는 들판에 염소떼가 풀을 뜯고 하이디와 페터가 뛰어다니는 장면, 휠체어를 탄 클라라와 함께 꽃들로 지천인 곳에서 자연을 즐기는 하이디의 모습,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는 노을 지는 저녁 장면, 무뚝뚝하지만 정이 많은 하이디 할아버지, 인자한 클라라의 할머니와 아버지 제제만, 앞을 못 보는 페터 할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하이디의 따스함. 이 모든 것들이 알프스의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다가온다. 흑백의 매력이다.     

하이디의 집

  마이엔펠트가 어떻게 해서 하이디의 배경으로 탄생했는지는 모르겠다. 관광대국 스위스가 약삭빠르게 하이디를 위한 배경지를 만들어 스토리를 불어넣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소설가가 이곳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후자로 생각하고 찾아가는 게 더 로맨틱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실제 그곳에 가면 하이디가, 페터가 어디선가 염소 몇 마리를 끌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들 테니깐. 클라라가 휠체어를 버리고 우뚝 일어서서 걸어나올 것 같으니깐. 하이디가 살았던 오두막집에서 할아버지가 염소젖을 짜 하이디를 불러 먹일 것 같으니깐. 우리는 오만가지 상상으로 행복에 젖는다. 상상력은 삶에 달걀노른자로 에그타르트를 만드는 것과 같은 꿈을 준다. 노른자는 한 때 포르투갈 제로니무스 수도원 수녀들이 수녀복에 빳빳하게 풀을 먹이기 위해서 달걀흰자만을 사용해서 늘 남아버린 잉여물에 불과했다. 달걀흰자가 현실이었다면 노른자는 그냥 버려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른자는 에그타르트라는 꿈이 될 수 있었다. 하나를 현실로 받아들이면 다른 하나는 꿈이 될 수도 있다. 한 가지를 선택하면 다른 한 가지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 된다. 우리는 한참을 망설이면서 선택한 길이 아닌, 그 가지 않는 길도 가보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고 꿈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그 꿈은 달다, 황홀하다. 갑자기 리스본에 가서 에그타르트를 먹고 싶어진다. 마이엔펠트에 가서 하이디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냥 꿈일까.     

하이디마을에서 염소에게 먹이를 주는 소녀

  마이엔펠트가 아니더라도 스위스의 자연환경은 어디를 찍어도 하이디가 살 법 한 곳이다.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곳.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살고 싶은 곳. 카메라를 'on'하면 이곳 저곳 찍는다고 좀체 끌 수 없는 곳. 그런 곳이 스위스다. 그렇다고 하이디가 스위스 전체에 살았다고 홍보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마이엔펠트라는 특정 지역이 선택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우리가 박경리의 『토지』를 만나기 위해 하동에 가거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마주하기 위해 벌교에 가보듯이.    

 

  그곳에는 일본관광객들이 유독 많았다. 아마 애니메이션을 추억하는 일본의 중년들에게는 마이엔펠트가 그 때 그 시절을 찾아가는 꿈같은 여정일 것이다. 먹고 살만해지면 지난 날을 찾는다. 천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가난한지도 모르고 그 가난을 뚫고 희망 같은 것을 품는다. 그런 희망들은 대개 거창한 사건들로부터 오는 것 보다는 한 편의 애니메이션일 수도 있다. 소확행. 매주 특정한 시간에 보는 재미와 즐거움. 별다른 오락이 없었던 시절 TV는 종합 엔터테인먼트였고 이국적인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보는 행복도 남다르지 않았을까. 그 살풋 내려앉은 추억이 이제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하이디마을 가는 이정표

  마이엔펠트는 스위스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에서 가깝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넘어가면서 들릴 수도 있고 리히텐슈타인 파두츠(Vaduz)를 거쳐 가 볼 수도 있다. 물론 자동차를 이용하면 훨씬 편리하다. 마이엔펠트에 도착하면 하이디를 찾아가는 길에 갈색 이정표를 볼 수 있다. 난 갈색이정표를 보면 늘 마음이 설레인다. 새로운 곳으로 안내하는 이정표 그 자체에 나는 이미 행복해지는 것이다. 한국의 도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한 관광지를 나타내는 갈색이정표와 도시를 보여주는 초록색이정표에 난 늘 열광했었다. 이정표는 방향이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아무튼 거기 갈색이정표에는 하이디 얼굴과 함께 ‘Heididorf’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dorf’가 마을이라는 뜻이니 ‘하이디마을’인 것이다.     


  자동차 없이 열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간이역 수준의 작은 역이라서 배차간격이 긴 게 단점이지만 유럽에서 열차는 왠만한 곳에는 간다. 이웃국가에서도 갈 수 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가 만나는 지점에 브레겐츠(Bregenz)라는 도시가 있다. 행정구역상 오스트리아인데 이곳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브레겐츠 페스티발이 열린다. 보덴 호수 위의 거대한 무대장치 위에서 열리는 오페라 공연을 해가 떨어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어갈 때 보는 느낌은 상당히 감격적이다. 여기서 오페라 한 편을 보고 가까운 스위스 아펜첼(Appenzell)에 들렀다가 리히텐슈타인 파두츠를 거쳐 마이엔펠트까지 이동하면 다양한 여행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펜첼

  아펜첼은 아펜첼러라는 치즈로 유명하다. 아펜첼러는 에멘탈러, 그뤼에르와 함께 스위스 3대 치즈로 불리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톰과 제리라는 만화에 등장하는 치즈는 스위스 베른 주 에멘 지방에서 생산되는 에멘탈러(Emmentaller)이고 스위스 서부 그뤼에르에서 생산되는 치즈로서 맛과 향이 강하고 퐁듀에 들어가는 치즈가 그뤼에르 치즈이다. 그리고 아펜첼러는 아펜첼 지방에서 생산되는 절반 정도 건조가 된 반경질 치즈를 말하는 것으로 향이 비교적 꼬리꼬리하고 진한 편이다. 내 입 맛에는 아펜첼러가 딱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펜첼에 들려 치즈와 육포를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펜첼은 우리가 아는 스위스의 이미지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예쁜 마을이다. 즉 그곳은 가장 스위스다운 마을로 소문나 있다. 우스개 소리로 스위스를 보려면 오스트리아에 가면 된다고 하는데 아펜첼에 가면 스위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면 단조로운 건물 외벽에 그려진 다양한 그림과 문양을 볼 수 있는데 어디를 보아도 예쁘기 그지없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치즈 공방에 들러보아도 좋다. 골목골목을 다니다가 언덕빼기 위로 올라가면 여기가 하이디마을이 아닌가, 하고 착각해도 좋다.     

마이엔펠트 인근 마을 Says의 어느 산장

  간절한 한마디 더. 하이디마을에 가서 하이디와의 만남을 즐겼더래도 바로 떠나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물가가 비싼 스위스를 빠른 시일 내에 주파하려고 일정을 촉박하게 짜서 취리히나 루체른으로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마이엔펠트나 그 인근에서 하룻밤 숙박하기를 권장한다. 교통편 여유가 된다면 산이 높은 산장에서 밤을 보내면 어떨까. 알프스의 향기가 무방비하게 콧속을 침범하고 하늘의 별빛이 빗물처럼 쏟아지는 밤, 지붕을 뚫고 나 있는 창을 통해 바라보는 밤하늘이 어찌 로맨틱하지 않겠는가. 그런 밤 혹시 난데없이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떠올라도 좋고 초록박공집의 빨강머리 앤이 불쑥 솟아나도 좋다. 꼭 하이디일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림출처: YES24]

  그곳에서 하이디를 만나고 일년 쯤 지나 인디고에서 출판한 『하이디』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 후, 새털같이 많은 나날들이 지나고 읽은 책. 책을 펼치고 첫 구절에, ‘스위스 어느 산자락에 마이엔펠트라는 작고 예쁘장한 마을이 있다’, 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 그 때 그 여정의 한 순간. 하이디를 만나고 인근 산장에서 달콤한 잠을 설쳤던 이중의 기억.     


  내가 한 여행은 일년 후 책읽기를 통해 다시 알프스 하늘의 별처럼 깜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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