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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r 24. 2019

기억된다는 것

-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로부터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른다. 2003년에 개봉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 눈을 감으면 잔잔하게 들려오는 클라리넷 소리. 미도의 테마라고도 불리기도 하는 ‘The Last Waltz’라는 영화 ost는 중독성이 강해 비 오는 날 들으면 마음이 저 아래 깊숙이 내려앉는다.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모루가 아흐레 밤낮동안 떨어져야 닿을 수 있는 지하 깊숙한 타르타로스로 침잠할 것 같은. 이 테마곡은 클라리넷이 절묘한 것 같다. 이 악기가 내는 소리의 특성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ost 덕에 악기를 이해한다. 피아노나 기타나 국악 버전도 있지만 역시 클라리넷이다.     

[그림출처: Daum]

  거칠게 말해 영화는 근친상간에 대한 복수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누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이우진(유지태 분)은 이를 소문낸 오대수(최민식 분)를 찾아 15년 동안 감금하고 풀어준 뒤, 최면을 걸어 딸 미도(강혜정 분)와 근친상간을 맺도록 하여 복수에 성공한다. 이 정도쯤 되면 인간 사회의 기저에는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공통구조가 있다고 말하면서 구조주의를 설명한 인류학자 겸 구조주의 철학자인 레비스트로스를 놀리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이우진이 그토록 복수에 불타오른 것은 상상임신을 하게 된 누나의 자살 때문이다. 근친상간에 대한 수치심에 더해 사랑하는 누나를 눈앞에서 잃어버린 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의 복수를 선택한 것이다.     


  강물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누나는 이우진의 목에 걸린 카메라 셔터를 눌러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서 찍으며 이런 말을 남긴다.


  “나 기억해주야 돼. 알았지? 난 후회 안한다. 넌?”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모습 같지만, 우리는 죽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기를 바란다. 흔적을 남기고 자취를 남기고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사실이 기억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의미는 아닐지라도 죽어가는 단 하나의 의미는 되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이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 가 이래서 중요하다. 가장 이상적인 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노선이다. 전 세계가 추앙하고 슬퍼하는 존재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쿨하게 죽을 수 있다. 어찌 좀 슬픈가. 겨우 이런 게 뭐 중요할까, 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겨우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라고 치부하지는 말자. 부끄러워하지도 말자. 아주 오래 전에도 이런 일은 흔했으니까.     

[그림출처: YES24]

  아주 옛날 아프로디테의 섬이라고도 불리는 퀴프로스에 신분이 미천한 이피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아낙사레테라는 공주를 보고 첫 눈에 반해버렸다. 사랑의 욕망에 눈이 먼 청년은 공주가 사는 궁전으로 찾아가 문에 꽃다발을 걸거나 돌계단에 뺨을 대며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공주는 얼음처럼 차가왔고 아기양 별자리가 바다에 잠기는 겨울바다만큼 잔인했다. 공주는 청년의 가슴에 수치심의 못을 박으며 일말의 희망도 꺾어 버렸다. 사랑의 세레나데에 실패한 이피스는 아낙사레테가 이겼다고 말하며 올가미에 목을 매어 자살한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면서. 자신의 사랑을 기억해 달라면서. 아낙사레테는 아니었다. 기억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해주거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탁인 것이다.    

 

  아, 하늘의 신이시여, 신들께서 우리 인간을 내려다보신다는 게 사실이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더 이상 기도를 드리지 못하겠으니 보시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를 기억하시어 저의 이야기가 노래가 되어 세세년년 사람들 입에 오르게 하소서. 신들께서 제 수명에서 빼시는 세월을 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더하셔서, 그만큼 더 오래 저를 기억하게 하소서.     


  그래서 조수미는 ‘나 가거든’에서 그렇게 불렀을까.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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