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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Aug 23. 2020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 몬테뇰라(Montagnola)

in Switzerland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아니었다면 스위스 몬테뇰라(Montagnola)에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몬테뇰라는 루가노에서 자동차로 20여분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다. 애초의 계획은 루가노를 거쳐 바로 이탈리아 밀라노로 넘어가려 했는데 어떤 우연으로 그 곳에 헤세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일정 변경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 그래도 헤르만 헤세에 대한 애정이 1파인트(pint) 생맥주잔 위로 가득 솟아오르는 기네스 거품만큼이나 풍성한데, 몬테뇰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예쁜 발음처럼 예쁜 마을이 분명할 거라는 미신적 촉수가 또 발동해 버린 것이다. 근사하고 사랑스러운 발음에 대한 환상은 합리적 사고체계와는 자주 이율배반이지만 고쳐지지 않는 기호를 어찌하랴. 대신 10여년 전에 들렀던 밀라노 두오모 성당으로의 재방문은 포기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손에서 놓아야 한다. 나는 헤세를 선택했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1962년 뇌출혈로 영면할 때까지, 그곳에서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 등의 작품을 썼다고 한다. 말년의 작품들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 구도의 길을 추구했던 것이 우연은 아니리라.     


  이 글이 작가를 찾아가는 여행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만일 작가에 관심이 없다면 몬테뇰라 가기 전에 만나는 루가노라는 도시를 들러보는 것도 괜찮다. 티치노(Ticino) 주의 루가노는 호반의 도시이다. 호수 저 건너편의 집들은 산비탈에 오손오손 모여 있는데 부산의 산동네 모습 같다. 시내로 들어가면 부드러운 파스텔풍 건물들이 곳곳에 보이고 늘어지고 여유 넘치는 이탈리아적인-우리가 아는 그 스위스와는 조금 다른- 삶이 곳곳에 녹아있다. 골목길 바닥에 책들을 펼쳐놓고 팔고 있던 중년의 아주머니는 우리를 보더니 반갑다며 대뜸 볼에다 키스를 하는데, 그런 살가움도 그만 반가워진다.     

[스위스 루가노 호수 풍경]

  사실 티치노의 주도는 중세도시 벨린초나(Bellinzona)이다. 그렇지만 그 중세도시의 느낌은 독일 로텐부르크나 체코 체스키크룸로프와는 사뭇 다르다. 유명하지 않아서 그런지 벨린초나에서는 아시아 관광객들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스위스 남부여행을 할 때 사람들은 그 곳을 건너뛰고 루가노를 더 선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벨린초나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는 3곳의 성곽이 있는데 올라가보면 저마다 운치가 있다. 나는 카스텔 그란데에 올랐다가 마침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는 어떤 이탈리아 가수를 만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사진을 함께 찍을 기회를 얻었는데, 벨린초나가 내게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벨린초나 카스텔 그란데]

  스위스 여행에 대해 더 말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위스를 갈 때는 서유럽 3개국이나 4개국 코스로 패키지 관광으로 떠나는 게 보통인 것 같다. 만일 이러한 입문자 코스를 통과했다면 스위스 일주를 추천한다. 스위스는 땅 면적에 비해 볼거리가 상당히 많은 국가이다. 더군다나 동부 지역은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독일 색채를, 서부는 프랑스 색채를 띄고 있고, 남부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는다. 스위스 시계처럼 동부에서는 기차도착시간이 정확하다가도 남부만 오면 기차가 연착되어버리기도 하는 느슨한 이탈리아의 색깔을 모두 맛보고 싶다면 스위스 패스를 끊어 곳곳을 다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본 궤도로 돌아가, 몬테뇰라에 가면 먼저 헤르만 헤세 기념관에 들러보자. 입구로 걸어가면 이지적이면서도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흑백사진이 건물외벽에 걸려있다. 앞에 높인 돌로 된 티테이블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는 그리움이 인다. 고국을 떠나 정착한 이곳에서 그는 진정 행복했을까.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구도정신과 타인과는 다르게 살아가려는 삶의 올곧은 지향성이 눈가에 아련하게 맺혀 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향한 관찰자, 감시자로서의 번득이는 시선도 느껴져 사진 속으로 들어가 한없는 가르침을 얻고도 싶다.     

[몬테뇰라 헤르만 헤세 기념관 입구]

  기념관 내부는 단정하다. 일층에는 기념엽서와 방명록 등이 있다. 내게 있어 엽서는 저렴한 아날로그 방식으로‘그 곳’을 그리워할 수 있는 소품이다. 집 거실 좌탁 유리 안에 모여든 엽서들은 치킨을 뜯을 때나 커피를 마실 때나 루미큐브 게임을 할 때나 부지불식간에 나를 ‘그 곳’으로 데리고 가버리는 단테 <신곡>의 베르길리우스 같은 길잡이가 된다. 차이가 있다면 지옥이나 연옥이 아닌 늘 천국으로 안내한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추억도 시간이 덧씌워지면 대개 그리움의 알갱이로 변모되는 건 여행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나는 엽서 서너 장을 사고 방명록에 독자로서의 감사함을 남긴다.     


  이층으로 오르면 그의 사진, 초상화, 캐리커처, 그가 쓴 책, 책을 쓰기 위해 사용한 타자기-컴퓨터키보드가 아닌 타자기가 놓여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가 그린 수채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창가에 놓인 타자기 밖으로 짙은 초록잎 나무가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의 수채화는 예쁘다. 그는 수채화가 어울린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물과 같은 맑고 투명한 그의 삶이 번져나온다.     

[헤르만 헤세 기념관 2층]

  기념관 근처 생아본디오 교회에 가면 그의 묘지가 있다. 사람의 마지막이 저장되어 있는 무덤에는 늘 연민이 따른다. 헤세의 무덤을 찾아 갔지만 찾는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무덤들이 애잔하다. 저마다 삶이 있었고 스토리가 있었을 텐데. 지금 모습이 화려하든 초라하든 살아 있을 때 그들 모두가 자기네 삶의 주인공들이었다.  

   

  헤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기웃대다가 결국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물으니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직육면체 모양의 비석에 HERMANN HESSE라고 쓰여 있다. 대문자다. 남은 자들은 그를 크게 기억해주고 싶었을까. 비석 주변에는 초목이 무성하다. 무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어본다. 삶과 죽음이 붙어 있으니 그도 말갛게 치~즈 하며 웃어주리라. 또 올게요, 마음 속으로 읇조리고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밀라노 방향으로 향한다. 

    

[몬테놀라 생아본디오 교회에 있는 헤세의 무덤]

  인근에 있는 아름다운 어촌마을 모르코테, 마조레 호수가 예쁜 로카르노, 이탈리아 북부 코모에 올 때, 이곳에도 또 찾아올 것을 스스로 다짐해본다. 살다 보면 마실 드나들 듯이 혹은 우연히 또 들르게 되어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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