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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어서좋아 Jul 29. 2024

라면아! 자니?

다이어트라는 이름으로 친구를 버린 자의 최후

지난주, 오래간만에 비가 그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뛰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수월하게 달리는 듯하였으나 오랜만에 달려서인지 속도도 나지 않고 뭔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때 떨어지는 한 두 방울 빗줄기... 아 망했구나! 생각했지만...


30초 후에 벌어진 일은 망했구나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통제 직전의 안양천 옆을 달리고 있었고 비는 정말 세차다 못해 몸이 따가울 정도로 퍼부었다.


다행히 천막을 찾아 비를 피했지만 이후 20분 동안 비는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아! 새 신발 신고 왔는 데... 그동안 두 번밖에 신지 않고 아끼던 신발을 신고 온 게 생각났다.


비가 잠시 그치자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부랴부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행로는 모두 침수되어 새 신발은 침수차량 마냥 세 번 만에 침수 러닝화가 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비는 계속 오다 그치다를 반복해 나는 온몸이 젖고 녹초가 되어 좀비처럼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편의점... 다이어트 4개월 차 라면을 멀리하고 있었는 데 진짜 무언가에 이끌려 나는


육개장 사발면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런 날씨와 분위기에는 육개장 사발면이다. 1초라도 빨리 국물을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큰 사발은 사치다.


소컵을 선택하면 처음엔 좋지만 나중에는 큰 결핍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매운 라면은 부담을 순한 라면은 부족함을 주지만 육개장 사발면의 맵기는 그 사이를 가른다.


지하수의 원리와 같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말이 길었다. 조리법 따위는 잊은 채 많이 설익은 라면부터 시작한다.


그 과자 같은 바삭함부터 시작되는, 하지만 목에 넘어가면 부드러운 느낌이 나는 식감이다.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라면에 순수하게 집중한다.


이미 면은 부드럽게 넘어갔고, 정신을 차릴 무렵 국물이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먹는 국물은 가끔 매콤한 느낌이 날 때가 있다. 조금 걸리지만 자극적인 그 느낌이 육개장 사발면의 큰 매력이다.


딱 적당한 포만감을 가지고 편의점을 나오면서 나는 나의 벗 라면에게 사과했다.


다이어트를 한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박대했던 나였다.


라면을 끓여주던 와이프에게 "탄수화물 먹으면 살찌는 거 몰라?"라고 외치던 나였다.


그러면서도 마라탕이나 김치찌개, 즉석 떡볶이에 있던 사리면은 몰래 먹고 있었다.


라면과의 인연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가게를 시작하시면서부터이다.


물론 밥솥에는 밥이 있고, 냉장고에는 반찬이 있었지만, 일주일에 3번은 꼭 라면물을 올리고 있었다.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인 나는 이상하게 라면에 있어서는 도전정신이 강했다.


슈퍼에 있는 라면 중에 안 먹어 본 라면은 전혀 없었다. 진짜 100% 다 먹어 보았다.


지금처럼 라면의 종류가 넘쳐나고 불닭면의 스핀오프 버전이 쏟아지는 세상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는 다양한 종류의 라면을 먹었고 새로운 라면 조리법에 심취해 있었다.


이는 30대까지도 이어져, 모든 음식에서 라면을 빼놓지 않았다. 삼겹살을 먹고 마무리는 항상 고기라면이었고, 부대찌개집은 라면사리 무한리필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혼자서도 라면사리 4개가 가능했다.


하지만 다이어트의 핵심을 저탄고지로 잡으면서 라면을 가장 큰 적으로 삼았다. 좋지 않은 기름에 나트륨도 많고, 혈당 관리에도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가끔 빵이나 국수 같은 탄수화물은 제대로 끊지도 못했다. 한식뷔페에 보쌈이 메인이었는 데 어찌 막국수를 참을 수 있으랴...


하지만 나는 편의점 라면 사건을 겪고 나서 깨달았다.


이제는 당당히 라면을 다시 벗 삼기로... 자주는 못 만나겠지만 당당하게 1주에 1번을 먹고 운동을 더할까 한다.  


이런 말하는 것 자체가 아직 라면을 다시 맞을 준비가 안되었다.


자꾸 횡설수설하는 건 다이어트의 부작용인 건가? 그래도 10킬로 정도 빼고 나니 예전에 먹던 음식들을 조금씩 먹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예전처럼 자주 많이 보지는 못하겠지만, 가장 좋은 자리, 시간에 함께 하자.


내 친구, 라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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