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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Aug 28. 2022

칠레와 페루 사이에 벌어진 복잡한 영토 분쟁의 역사


남미에서 벌어졌던 주요 전쟁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1879년에서 1883년 사이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연합군 사이에 벌어졌던 태평양 전쟁입니다. 칠레는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가져가며 볼리비아의 해안 접근을 막아 내륙 국가로 만들었고, 안콘 조약 (Treaty of Ancon)을 통해 페루의 이키케, 아리카를 포함한 타크나 주까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원래 페루와 칠레 두 국가는 협상에서 "합병 이전에 아리카와 타크나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자"라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즉, 각 주의 주민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고 싶은지 결정 내리고, 그 결과를 따르기로 합의를 본 겁니다. 하지만 투표 방식에 대한 양국 견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그 사이 승전국 칠레가 1909년 두 영토를 무력으로 점령했습니다. 조약에 없는 방식으로 땅을 빼앗긴 페루는 1911년 칠레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며 보복 조치를 취했습니다.


10년 넘게 앙숙으로 남아있던 두 나라는, 1922년부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물론 자신들끼리는 평행선만 달리게 될 걸 알았기에 제3 국가인 미국을 초대해 분쟁을 중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노력에도 협상은 진전 없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1928년이 돼서야 미국 켈로그 국무장관이 워싱턴 D.C. 에서 직접 협상을 제안하며 조금씩 합의점을 찾게 됩니다.  


1929년 6월 3일. 양국은 리마 조약 (Treaty of Lima)을 맺게 됩니다. 칠레가 아리카 주를 그대로 관리하는 대신, 페루에게 타크나 주를 반환할 것에 동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또 칠레는 페루가 아리카 지역에 부두를 건설하고 6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페루에게 일부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29년 8월 28일 새벽. 타크나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펄럭이던 칠레 국기가 내려갔고, 페루 국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매년 타크나에서 벌어지는 행사 (사진 자료: diariocorreo)


이 소식을 듣게 된 수천 명의 타크나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페루 재합병을 축하했습니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타크나 출신 사람들을 타크네뇨 (tacneños)라 부르는데, 이들 대부분은 과거부터 페루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재합병 발표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의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칠레는 수많은 칠레 군인과 민간인을 타크나로 이동시켜 칠레화 (Chilenización) 정책을 펼쳤지만 타크나 주민들은 페루 문화를 고집했고, 결국 칠레의 노력은 리마 조약과 함께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현재 타크나 지역의 지도를 보면, 8월 28일 광장, 8월 28일 경기장, 8월 28일 공원이 있고, 심지어 백화점 이름도 '8월 28일 백화점'인걸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1929년 8월 28일은 중요한 날로 기억되고 있는걸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매년 이 날만되면 타크나 주민들은 행진 국기 게양식을 진행하며, 다시 페루의 주가 된 자랑스러운 순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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