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치역에서 남쪽으로 걷는 길은 몹시 더웠다. 때마침 남중(南中)한 7월의햇볕은 피할 곳이 없었다. 오른편으로 산자락에 잇닿은 소소한 주택과 건물이, 길 건너편으로 바다에 면한 냉동창고가 이어졌다. 한여름 열기에 푹 익은 비린내가 줄곧 불어왔다.
큰길 안쪽으로 접어들자 사람 두 명이 간신히 지날 만한 골목이 굽이굽이 위로 이어졌다. 웃옷이 땀으로 완전히 젖었을 즈음 골목이 트이면서 이태석 신부 기념관이 보였다. 부산 서구 천마로 50번길 70. 톤즈의 성자, 바로 그 이태석이다.
워낙 비탈에 들어선 4층 건물이라 정문으로 들어서면 2층이 나온다. 3층에 이태석 신부님의 제의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신부님의 생애와 톤즈에서의 활동, 임종 직전 신부님의 영상도 한켠에서 조용히 돌아간다. 아무도 없는 전시실에 신부님의 목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 왔다.
이태석. 그의 삶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목이 말라 신부님을 찾았다. 잘 살고 싶은데, '이것이다' 하면서 살고 싶은데, 삶은 속절이없었다. 타성에 젖어 하루를 보내면 그 하루가 다시 타성이 되었다.매일이 좀비처럼 흘러갔다. 신부님이 생각났다. 신부님이라면 답을 주시지 않을까.
신부님이 톤즈에서 입던 제의를, 손때묻은 묵주를 바라본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환자를 돌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나환자들에게 맞춤 샌달을 만들어 주던 그의 삶에 감동하면서도 동감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가 미웠다. 그의 흔적을 마주하면 할수록, 나는 이태석이 될 수 없다는 확신만 강해졌다. 신부님의 제의와 묵주는, 그가 나와 다른 사람임을 말하는 표식일 뿐이었다.
기념관 뒤편으로 신부님의 생가와 만남의 방이 있다. 마침 60대로 보이는 이태석 기념사업회의 활동가 자매님 두 분이 만남의 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계셨다.환대로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넙죽 받아마시는 모습이 흐뭇했던지 전자레인지에 데운 피자 한 조각이 따라나왔다.
신부님의 힘이었을까, 초면의 인사가 곧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속내로 이어졌다. 이곳을 찾은 동기를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다. 다행히 그들은 나의 고민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넋두리가 끝나자 한 자매님이, 자신은 '그냥 산다'고 하셨다. 다른 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좀 더 자세한 얘기를 청했다.
그냥 산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자매님은 삶에서 어떤 계획이나 기획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데로 간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행복하십니까? 놀랍게도 자매님은, 그렇다고 했다.
짐작되는 바 있었다. 계획이나 기획이란, 실은 '계산'이다. 무엇이 내게 더 이득이 될지 두드려보는 셈법이다. 하지만 삶은 주식투자와 비슷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변수는 늘 있게 마련이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투자가 수익을 보장하지 않듯, 삶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마냥 '묻지마 투자'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냥 산다는 것이,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살라는 것일까? 다시 물었다. 자매님, 계획 없이 산다고 해서 막 사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답이 빨랐다. 생각과 삶이 하나라는증거였다. 그녀는 '이것이 누군가를 이롭게 하는가'가 판단의 기준이라고 했다. 알아들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내 마음을 기울이는 것,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의 본질적 의미였다.
이태석 신부님도 그랬을 것이다. 의대를 졸업했으니 안락한 삶도, 한평생 고생하신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는 톤즈로 향했다. 제아무리 이태석이지만, 그건 사람의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이 마련한 순종의 자리에 신의 사랑이 들어선 결과다.
자매님도 그렇게 살았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사랑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이것도 하느님이 시키시는 일이려니' 산다고 했다. 지금은 노인복지 일을 하고 있는데, 자식들조차 찾지 않는 노인들의 손발이 되어 식사를 마련하고 씻기는 일이 때로 힘겹기도 하지만, 그저하느님의뜻으로여긴다는것이다.
듣다 보니 또 막막해졌다. 나는 이태석이 될 수 없는데, 이 자매님도 내게는 너무 컸다. 내 속좁은 갈등이 눈에 비쳤던지 자매님은 성경 읽기를 권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무언가 느껴질 것이라고 했다. 사랑이 판단의 기준이라면, 성경 읽기는 그 사랑을 예민하게 보살피는 일이다.
벌써 1년 8개월째 새벽 미사에 나가고 있지만이 또한 타성이 되어 가던 참이다. 성경을 읽으라는 말씀은 형식화된 신앙을 넘어 영적 수혈을 권하는 말씀으로 들렸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감지해야 비로소 순종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지도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대화가 한 시간을 넘어설 때쯤 문득 알았다. 그랬구나. 이런 말씀을 나누라고 하느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구나. 신부님의 제의와 묵주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제의와 묵주 덕에 그를 닮은 자매님을 만나, 신부님을 만났어도 비슷했을 나눔을 받고 있는 것이구나.
자매님과 인사하고 기념관 근처의 송도 성당으로 향했다. 이태석 신부님의 본당이다. 저녁으로 접어들지만 날은 여전히 뜨거웠다. 이 순간을 잊지 않으려 성당을 향해 걸으면서뇌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그냥 산다. 다만 사랑을 향한다. 그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늘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다.
잘 살기 위해 이태석이 될 필요는 없었다. 신부님이 살았을 법한 삶의 방식을 알았고, 이제 내 삶의 자리를 톤즈로 삼으면 되었다. 그리고 속절 없이 흐르는 세월을온전히 '그분'께 맡기면 되었다. 송도 성당 마당에 들어서자, 그분께서 두 팔을 벌려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