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실재(實在)가 없다고 가르친다. ‘나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내가 맥주를 좋아하게 된 것은 살면서 겪었던 온갖 만남과 사건 속에 형성된 우연적 기호일 뿐 나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내 이름이 아무개라거나 어디 소속이라는 따위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결국 ‘나’라고 할 만한 불변의, 고유의 속성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떠하다’는 생각, 즉 아상(我相)에 얽매여 집착을 부린다. 불교는 이 아상이 허상임을 알게 함으로써 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친다. 이것이 불교의 ‘공(空)’ 사상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걷어낸 자리에는 정말 ‘공’만 남을까? 붓다만이 아니라 인류의 많은 스승은 ‘참된 나’를 찾으라고 강조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수상행식의 ‘오온(五蘊)’을 걷어내라는 뜻이다. 그런데 참된 나를 찾으려는 노력 끝에 만난 것이 ‘정해진 것이 없음’일 뿐이라면, 심원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공’이란 단순한 ‘무’ 또는 ‘정해진 것이 없음’을 넘어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여기 한 인물의 초상화가 있다고 하자. ‘공’이란 뒤덮은 물감을 걷어내고 드러난 최초의 형상이다. 어떤 물감을 입혔는지에 따라 피부색도 입은 옷도 달라질 수 있겠지만 초상화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사람 형태의 스케치, 그것이 곧 ‘공’이요 참된 나다.
그러한 나는 피부색으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 입은 옷으로 상대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조금 다른 형상, 예컨대 강아지나 나무의 형상이라고 멀리 여기지도 않는다. 어차피 백지 위의 선이라는 주제는 비슷하다.(이 선을 누가 그렸는지로 나아가면 크리스트교로 이어진다.) 이렇게 참 나의 세계에서 나와 너의 선은 쉽게 겹쳐지고, 사람과 사람 아닌 형상 간 경계도 흐려진다.
물론 나의 ‘개성’을 아는 것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나를 알아간다는 것이 고작 MBTI일까. 개성을 걷어낸 본성이 참된 나의 모습이다. 거기에서 나와 너는 서로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