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이지만 예수의 부활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세상에 믿지 못할 일이 '처녀가 애를 배었다'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인데, 예수님은 기적의 2관왕이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다’고 했지 ‘믿지 않는다’고 말한 건 아니다. 내가 의심하는 이유는 믿고 싶어서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처럼 유신론을 반박하고 무신론을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내 경우에는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질 않으니 의심하고 묻는 것이다. (어쩌면 도킨스도?)
그렇다면 왜 믿고 싶은 것일까? 종교 일반으로 확장하면 '왜 종교를 가지려는 것인가?'가 된다. 2024년 조사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답은 '마음의 평화'였다. 그 뒤로 가족의 안녕, 인간적 교류, 부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축복 등이 따랐다. ("구원보다는 마음의 평안 위해… 한국인 신앙생활 이유"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240812/1525729) 말하자면 한국인 다수는 강력한 존재에 귀의하여 안식과 축복을 구하는 데에 종교의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럴 경우의 믿음은 '기대'에 가깝다. 신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나를 지켜줄 만한 힘이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품고 종교적 효용(평안, 축복의 기대 등)을 기대한다. 예수를 줄줄이 따라 다녔던 다수의 군중도 이런 믿음의 보유자였다. 예수님도 그 마음을 아셨기에 군중들에게 기적을 베푸셨다. 옷자락만 잡아도 병이 낫고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죽은 자를 살려내는 예수의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기대로서의 믿음'이 유지되려면 끊임 없는 증거가 필요하다. 만약 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겠다는 의심이 들면 기대로서의 믿음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그 많은 기적을 눈으로 본 군중들도, 심지어 예수를 코앞에서 따랐던 제자들조차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예수의 죽음을 지킨 건 사도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 몇 명 뿐이었다.)
하지만 '기대로서의 믿음'과 또 다른 믿음의 양상이 있다. '받아들임으로서의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의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삼고 이를 동력삼아 어떠한 행위에 나서게 되는 경우의 믿음이다. 예를 들어 민족의 독립이나 민주주의를 위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이들은 독립과 민주주의가 가져다 줄 구체적 반대급부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다는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이러한 '받아들임으로서의 믿음'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들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뭔가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것을 아예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는 뜻인데, 흔하고 세속적인 것을 자신의 심장과 허파 사이에 끼워 넣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돈이 최고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따위는 그러므로 '받아들임으로서의 믿음'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둘째, 이에 따라 '받아들임으로서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대외적 행위를 낳게 된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고귀한 것이란 사랑, 헌신, 봉사, 존중처럼 대부분 자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다. 이러한 가치를 깊이 '받아들인'('기대한'이 아니라) 자라면 그 사람의 행위는, 설령 그의 모든 행위는 아닐지라도, 그러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 된다. 강력한 명제가 탑재될 때 인간은 그 명제를 따르기 위한 행위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돌아가면 '동정녀 잉태'나 '부활' 역시 '기대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서의 믿음'의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내게 '복'을 주실 전능성의 증거가 아니라 내게 '힘'을 주는 격려의 메시지다. 예컨대 동정녀 잉태는 마리아가 ('처녀가 애를 뱄다'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했다는 의미로, 부활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에 용기를 지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의미로 읽히게 된다. 따라서 크리스트교 신자라면 이러한 '받아들임으로서의 믿음'을 통해 '동정녀 잉태'와 '부활'을 자신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이를 용기 있게 실천해 나갈 힘의 근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트교인이 외는 <사도신경>은 12가지 믿음의 고백으로 되어 있다. 그 두 번째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 다섯 번째가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이다. 나머지 10가지 믿음의 대상도 '받아들임으로서의 믿음'이라는 눈으로 읽을 때, 사도신경은 복을 바라는 주문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라는 준엄한 지침으로 내게 들어온다. 이제야 나는 성경대로만 믿으면 복을 받으리라는 삿된 기대 없이, 예수가 부활한 게 아니라 가사(假死)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것 아닌가 하는 식의 의심도 필요 없이, 동정녀 잉태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