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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神] 십자가는 두려운 것

by 김정환


고대 로마애서 십자가형은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십자고상(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형상)에서 예수님의 아랫도리는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이건 일종의 예의(?)상 조치일 뿐 실제 십자가형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형리들은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의 옷을 완전히 벗겨 채찍으로 일단 반 죽음 상태로 만든 후 못을 박아 매달았다. 지중해 연안의 뜨거운 햇살 아래 사형수는 그렇게 죽을 때까지 구경거리가 되었다. 십자가형의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다. 숨을 쉬려면 횡경막이 오르내려야 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채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사형수는 점점 깔딱대다 끝내 목숨을 거두는 것이다. 그렇게 가장 치욕스럽고도 가장 고통스럽게 사람을 죽이기 위한 형틀이 십자가였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반역과 같은 중죄인에게만 내려졌고 로마의 시민권자는 십자가형에서 면제되었다. 성경에서 바울은 ‘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역으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던 당대의 인식이 반영된 말이다.


오늘날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물이 되었다. 크리스트교에 속하는 종교(가톨릭, 개신교, 동방정교회 등등)인은 물론, 일반인도 별 생각 없이 십자가를 착용하거나 디자인으로 애용한다. 그저 직선 두 개가 교차되었을 뿐인 단순한 형태를 사람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의 상징으로 여기는가? 만약 악을 내쫓고 복을 빌어주는 일종의 부적이나 행운의 징표로 십자 문양을 선호한다면 이는 십자가의 기원에 비추어 상당히 이상한 일이다. 온몸이 찢기고 발가벗겨진 채 뙤약볕 아래서 헐떡대다 죽은 이의 형틀을 네잎 클로버쯤의 소품으로 여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비종교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만약 내가 크리스트교인이라 한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다르게 새겨져야 할 것이다. 불자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듯 예수교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불자들이 붓다의 말과 행동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애쓴다면 예수교인들은 예수의 말과 행동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예수가 (교리에 따르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다면 예수교인들 역시 (세상의 구원까지는 아니라도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겠다 다짐해야 할 것이고, 십자가는 그러한 다짐의 상징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십자가는 매우 두려운 상징이다. 예수가 스스로를 희생한 방식대로 나를 바치겠다는 결단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지금껏 그런 생각으로 십자가 앞에 서거나 각종 십자 물품을 지녀오지 않았다. 바라는 게 있을 때마다 십자가 아래서, 혹은 십자가를 뭍들고 떼만 썼지 나를 그 자리에 매단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니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팬티도 걸치지 못한 채 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주여! 이루어 주소서!’ ‘주여! 베풀어 주소서!’ 외치고 있었다니.


생각이 여기 이르자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가 다시 읽힌다. 시인은 아마도 ‘크리스트교를 크리스트교이게 하는 것’의 핵심을 젊은 나이에도 간파했던 듯하다. (나이와 무관하게 영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십자가를 보면서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을까? 십자가의 ‘힘’을 빌었을까 십자가의 ‘형‘을 빌었을까? 번지수를 잘못 찾은 기도가 번번이 퇴짜맞았던 이유도 다른 데에 있지 않았을 터. 만약 시인처럼 기도했다면 신은 훨씬 더 많은 기도를 들어 주셨을 것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 <십자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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