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금 여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슴푸레 Feb 06. 2024

날은 차차로 차차로 밝아 오다가

  채만식의 탁류에 나오는 구절이다. 온전한 문장은 '날은 차차로 차차로 밝아 오다가 삽시간에 아주 훤하니 밝는다.'다. 새벽 산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아! 하고 탄식할 표현. 시처럼 흐르는 표현은 사실이었다.  


  입춘인지도 모르고 시작한 산행이었다. 겨울 방학 내내 애들이 집에만 있어 통 운동을 안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러면 애들을 데리고 치현산부터 개화산까지 좀 길게 돌자는 얘기가 나왔고, 일요일엔 어머니 댁에 가야 하니 아침 일찍 가자는 얘기가 나왔고, 그럴 거면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해 해가 뜨는 것을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토요일 밤. 다음 날 일출 시간을 검색해 오전 5시 반으로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 소리에 작은애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나를 깨웠다. 10분만을 외치고 단잠을 자다가 으차! 하고 일어났다. 전날 축구 경기를 보느라 세 시가 넘어 잠든 남편은 정말 갈 줄은 몰랐다며 나갈 때 깨우라는 말을 하고 눈을 붙이러 작은방에 들어갔다. 나는 눈곱만 떼려다 찬물에 세수를 했다. 머리칼을 쓸어 하나로 질끈 묶고 큰애를 깨웠다. 보일러를 끄고 불을 끄고 네 식구 모두 밖으로 나왔다. 6시 15분이었다.


  편의점에 들러 생수 두 병과 좋아하는 맛으로 추파춥스 사탕 세 개를 샀다. 남편은 안 먹겠다고 했다. 밖이 너무 깜깜했다. 치현교회 왼쪽으로 해서 치현산을 오르는  경사도 있고 위험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근린공원으로 해서 개화산 둘레길 코스로 가자. 남편은 눈을 반쯤 감고 걸었다. 눈 좀 떠. 넘어지겠다. 작은애와 내가 앞장을 섰다. 둘레길 입구에서 작은애가 휴대폰 앱으로 손전등을 켰다. 돌부리에 걸리지 않게 조심조심 걸었다. 이 시간에 아우. 넷이기는 했지만 사위가 어두워 자꾸만 뒤를 보게 됐다.


  점점 숨이 가빠졌다. 길가 오른쪽에 바위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 위에 까만 물체가 보였다. 고양이 같았다. 어? 아닌가. 고양이라면 야아옹 했거나 경계를 하고 도망을 쳤을 거였다. 못 본 척했다. 깜짝이야! 했다가는 초긴장해 있는 작은애가 기절초풍할 게 뻔했다. 중턱쯤 오르자 벤치가 보였다. 각자 자리를 잡고 생수병을 따서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사탕을 먹을까 하다가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나무 뒤쪽으로 한강과 불빛과 도로가 내려다보였다. 올라오는 사이, 날이 더 밝아 있었다. 무서운 마음이 그제야 물러났다. 6시 40분이었다. 약사사에 들렀다 하늘길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약사사 입구에 플래 카드가 걸려 있었다. '입춘 기도'를 보고 입춘임을 알았다. 경내에 들면서 합장을 했다. 대웅전 지붕이 개화산인 양 깃들어 있었다. 날렵하게 쓰인 '대웅전' 글씨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중년 여성이 삼층 석탑 옆에서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대웅전을 낮은 울타리처럼 두른 연등은 은은하면서도 뚜렷하게 빛을 내었다.


빛은 이렇지.


  마음속에 뭔가가 자꾸 새겨졌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밝으면 연등은 꺼질 거였다. 이만큼 나를 이끈 빛들이 생각났다. 다시 내가 어두워지면 그 빛들은 조용히 길을 밝힐까. 날이 밝든 어둡든 스스로 빛을 내고 있을까. 여러 빛들이 눈앞에서 일렁였다.


  작은애와 세 번 탑을 돈 뒤 개화산 전망대에 갔다. 날이 반쯤 밝았다. 밝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새가 하나둘 지저귀었다. 평온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다급해졌다. 7시 34분까지 하늘길 전망대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해가 뜨기에는 날이 너무 흐렸다. 습했다. 비가 오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 순간 전국 여기저기서 수차례 감상한 일출이 떠올랐다. 해를 보며 품던 그 마음 그대로 살았다면 나는 달라졌을까 생각하다, 매정초 해 보러 가는 대신 매순간 열심히  그 숱한 날이 있어 지금의 나도 있는 걸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신선바위를 지날 때쯤 날이 거의 밝았다. 날 샜다는 말이 들렸다. 깜깜했던 새벽과 서서히 밝아지던 하늘. 그리고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빨리 밝아 버린 아침. 일출은 결국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깜깜해도 날은 밝기 마련이고
일단 밝기 시작하면 속수무책 훤히 밝는다는 것을.


  채만식의 문장은 과연 사실이었다.


#입춘#새벽산행#일출은못봤지만#깨달음이있던하루#날은밝고#끝내봄은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