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이 좋다. 혼자도 둘이도 여럿이도 좋다. 빨리도 좋고 느릿느릿도 좋다. 다리를 움직이며 조금씩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다. 벗어나면서 달리 보이는 풍경이 좋다. 풍경이 걸어오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좋다. 잠시 멈춰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걸으면 걸을수록 비워지면서 채워지는 것이 좋다.
남편과 바람을 쐬러 나갔다. 차를 타고 인천 계양산이라도 가자고 했지만 동네가 좋다고 했다. 이리로 시집온 지 15년. 걸어도 걸어도 새롭다. 오래된 골목을 걷고, 40년은 족히 됐을 마호가니색 단독 주택을 만나고, 보물찾기하듯 노포를 발견하는 것이 좋다. 쌀집이었을 가게의 떼어진 글자 스티커를 보는 것이 좋고, 슈퍼라고 쓰여 있지만 상회에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 물을 사는 것이 좋다. 걷고 있으면. 걸었다 멈추면. 멈추었다 다시 걸으면. 마침내 걷기가 끝나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
미타사를 내려와 개화동 주택 단지를 걸었다. 안쪽일수록 현대적이었고 바깥쪽일수록 세월이 느껴졌다.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으나 다른 시간에 태어났을 집들이 담을 두고 저마다 서려 들어 있었다. 발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길고 넓은 담벼락에 소나무 줄기가 뿌리처럼 얽혀 있었다.
담장 위에 마른 솔잎이 갈색으로 소복했다. 옆으로 옆으로 뻗은 가지의 시작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실핏줄 같은 잔가지도 제법 굵었다. 봄이 오면 저 가지에도 솔잎이 돋아날까. 회색 담장에 붙은 솔잎은 어떤 모습일까. 여린 연둣빛의 머리카락 같을까. 솔잎을 달고 있지 않아도 이 모습 이대로 좋을 것 같았다. 벽에 착 붙어 견뎌 냈을 소나무의 시간이 장엄하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