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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Mar 23. 2024

외삼춘이 외삼촌이라고

  처음 국어가 어렵다고 생각한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국민학교 1학년 2학기 때였다. 국어책 내용이 그랬다. 포도가 익어 가요 어쩌고저쩌고. 외삼촌이 집에 왔어요 어쩌고저쩌고. 길지 않은 문장이 운율을 맞춰 대구를 이뤘다. 마루에 엎드려 국어책을 소리 내어 읽는데 너무 이상했다. 나는 막내 외삼춘을 외삼춘이라고 하는데 책에는 외삼촌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해 본 적 없고 그렇게 써 본 적이 없는 세 글자를 읽을 때마다 멈칫멈칫 이상했다. 내일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고 했다. 외삼촌이 나오면 외삼촌으로 써야 하나, 외삼춘으로 써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받아쓰기는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게 아니니까. '먹었읍니다'를 '머거씀니다'로 적지 않으니까. 외삼춘도 외삼촌이라고 적는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럼 나는 앞으로 외삼춘을 외삼촌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우 이상해. 입에 안 붙어. 계속 투덜투덜댔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외삼춘을 왜 외삼촌이라고 써야 하는지. 어쩐지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못할 것만 같았다. 끝내 담임 선생님에게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외삼촌이란 단어만 보면 외삼춘과 국민학교 1학년 2학기 국어책이 자동으로 생각났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국문과 방언학 시간에야 알았다. 모음체계에서 모음 '오'가 수직으로 상승(vowel rising) 하면 '우'가 된다는 . '삼촌'을 '삼춘'이라고 하고 '외삼촌'을 '외삼춘'이라고 한다는 . 유레카! 전광현 교수님께선 표기에는 형태음소적 표기가 있고 음소적 표기가 있다고 했다. 공적인 상황에선 일관되게 적어야 의사소통에 혼란이 없다고 했다. 십여 년이 지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다. '어'도 '으'로 모음 상승 한다고 했다. '어른'을 '으른'이라고 발음하고, '버스에서 서서 갔어'를 '버스에서 스서 갔어'라고 한다는 것을. 왜 그렇게 고등학교 때 부산이 고향인 담임 선생님이 나를 스녕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음운론이 재밌었다. 논리적이고 규칙적이고 딱딱 답이 떨어지는 것이 놀라웠다. 국물이 궁물로 소리 나는 음운의 변동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방언론은 뭐랄까 음운론의 설화 버전 같았다. 음이 분화되면서 뜻이 분화되는 것을 배울 땐 역사비교언어학을 하고 싶었다. 음을 재구하고 친족어 관계를 찾는 것이 재밌었다. 오호 통제라. 국어학에의 운명은 1학년 2학기 국어책의 '외삼촌' 표기를 놓고 갈등한 바로 그때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다.


  1988년. 맞춤법이 바뀌면서 1989년부터 교과서의 표기가 일제히 바뀌었다. 따라서 글짓기를 할 때도 '먹었읍니다'는 '먹었습니다'로 써야 했고, '고맙습니다'는 처음부터 '고맙읍니다'가 아니었으므로 '고맙습니다'로만 적었다. 글짓기 숙제를 좋아했지만 빨간 벽돌 무늬 같은 200자 원고지를 내기 전에는 한 번씩 더 확인해야 했다. '새로와'를 '새로워'로 써야 했고, 성과 이름을 띄어 썼던 것을 모두 붙여 써야 했다. 익숙해지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숙제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표기가 눈에 익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봤던 <디즈니 그림 명작>만 읽으면 다시 헷갈렸다. 맞춤법이 바뀌기 전의 표기였으니 당연했다. 아웅 어려워. 헷갈려도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그 시절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맞춤법이 왜 바뀌었고 앞으로 이렇게 써야 되는 원리를 알려 주지 않았다. 무조건 외우라고 했고 그걸 시험에 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랬다. 오엑스 치는 것이 다인 맞춤법 시간이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그런데 요즘의 교과서는 안 그랬다. 원리와 예시가 학생 눈높이에 맞게 소개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한 줄 요약: 맞춤법은 외우게 하지 말고 원리와 예시를 적절히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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