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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Mar 26. 2024

물체주머니 속 빨대 묶음

  국민학교 1, 2학년 때 물체주머니는 학교에 고 다녀야 할 준비물이었다. 내용물의 한두 개씩은 꼭 잃어버렸고 낱개는 팔지 않아 엄마 물체주머니 사게 천 원 주세요 하면 지난주에 샀는데 뭘 또 사, 그냥 가 했다. 싼 건 천 원 비싼 건 삼천 원쯤 했다. 불투명 하늘색 비닐에 내용물이 그려져 있었고, 맨 위에 줄이 꿰여 있어 쭉 잡아당기면 주머니가 오므라졌고 자루의 아귀에 손을 넣고 늘이입을 벌렸다. 빨강 파랑 노랑 나무 블록, 빨강 파랑 노랑 미니 빨대, 동그라미 세모 네모 단추, 돌멩이 등이 한데 들어 있었지만 쓰는 것보다 안 쓰는 게 더 많았다. 그중 미니 빨대는 언제나 노란 고무줄에 묶여 책상 위에 펼쳐지는 날이 없었다. 물체주머니는 주로 <슬기로운 생활> 시간에 썼다. 단추들을 주르르 늘어놓으면 선생님이 말했다. 네모난 것과 동그란 것을 갈라 보세요. 다 했나요? 그럼 그중에서 구멍이 두 개인 것과 한 개인 것을 묶어 보세요.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지시대로 단추들을 가르고 묶으며 말을 들었다.  


  아이들의 물체주머니 빨대 묶음 그림 아래엔 글씨가 다 달랐다. 어떤 건 '산가치', 또 어떤 건 '산까치', 또 다른 건 '산가지'였다. 선생님이 뭐라고 발음했는지, 칠판에 어떻게 썼는지, <슬기로운 생활>책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셈을 하는 데 필요한 가지라는 것을 알 리 없었고, 그냥 알록달록 촌스러운 미니 빨대라고만 생각했다. 따라서 그걸로 놀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고 숙제한다고 굵은 줄 공책에 빨대 묶음을 열심히 그리고 색칠했던 것과 자를 대고 그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만 생각난다. 아마도 빨대를 옮기는 활동을 하면서 덧셈 뺄셈을 배울 수 있게 일종의 교구처럼 물체주머니에 들어 있었겠지만 빨대들은 볏단처럼 묶여 물체주머니 속에 얌전히 있었다.


  어느 날엔가 덕이는 그 빨대 묶음을 모두 풀어 한쪽 구멍을 다른 빨대의 구멍에 넣어 모양을 만들었다. 세모, 네모를 만들어 위아래로 두니 집이 되었다. 스케치북에 빨대로 만든 집을 붙이고 빨대로 둘러싸인 벽에 크레파스로 색칠을 했다. 와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국민학교 1학년이 한 거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꼼꼼하고 표현이 기발했다. 심지어 네 개의 빨대 끝에 가위집을 내어 스케치북에 붙여 다리를 만들고 두꺼운 종이를 잘라 다리 위쪽에 붙여 의자 바닥을 만들었다. 마당에서 앉아 쉬는 의자라고 했다.


  1학년이 끝날 때까지 나는 빨강 파랑 노랑 미니 빨대를 쓰지 않았다. 덕이처럼 뭔가를 만들거나 꾸미기엔 손재주가 없었고 비슷하게 따라하는 건 나쁘다고 생각했다. 안방의 낮은 은색 철제 책상 서랍에 처박혀 있던 물체주머니 속에 빨대 묶음 또한 잠자코 있었다. 더 이상 쓸 일이라곤 없어 버리려고 할 때 물체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비닐에서 페인트 냄새가 훅 끼쳤다. 빨대 묶음을 풀어 빨대를 자근자근 씹었다. 플라스틱 냄새가 났고 빨대에 잇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몇 개를 더 씹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걸로 우유를 먹기엔 너무 짧았고 그게 없어도 덧셈 뺄셈은 할 줄 알게 되었다. 빨대 묶음은 쓸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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