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1시 59분 마감을 앞두고 55분쯤 공유 서버에 들어가 작업 파일을 올렸다. 12시가 조금 넘어 침대에 누웠다. 우울해하는 아이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괜찮을 거야. 자꾸 생각하면 잠도 안 오고 악몽 꾸니까 어서 자자. 잠들 때까지 엄마가 보고 있을게. 한쪽 발을 마사지해 주자 3분도 안 돼 작은애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이튿날 회의에서 리포트할, 20세기 초 한국어 학습서를 서치하고 소장 도서관에 들어가 영인본을 뷰어로 확인한 다음, 구글 시트에 링크를 붙였다. 문헌별 특징과 서지 정보를 기록하고 나니 새벽 3시 반. 스탠드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6시로 맞춰 놓은 알람을 끄고 30분을 더 잤다. 아침을 준비해 먹이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작은애가 옆에 앉아 안아 달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 나 힘들어. 학교 가기 싫어. 한숨을 삼키고 어금니를 물었다. 많이 힘들구나. 이번 주도 3일 빠졌는데, 힘들어도 오늘은 가 보자. 이런 내가 정말 싫은데 못 가겠어. 생각에 날개가 돋쳤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병결 처리하고 같이 있을까. 연구원엔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다 하고 줌을 열어 달라고 할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뗐다.
-그럼 1교시만 하고 올까.
-나 정말 힘들어.
-2학기 병결이 20일이 넘었어. 지금은 마음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물이 빠지지 않아 질척하고 힘들지만 물을 빼야 땅도 마르고 마음도 뽀송해지지. 우리 조금씩 힘내 볼까. 오늘은 좀 흐린 거지, 폭우는 아니니까 1교시만 하고 오자.
-....... 그럼 엄마. 2교시만 하고 올게.
-정말? 우리 딸, 한 시간 더 있어 보려고 하고. 대단하다. 마음 힘든데도 이겨 내려고 하고.
-상담 톡으로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려 놓을게. 엄마 10시 반 회의라 통화 안 될 거야.
-응. 엄마도 조심히 다녀와요.
-아빠 카드 두고 갈게. 조퇴하면서 점심 먹을 거 사 가지고 들어와.
-응. 엄마 고마워요.
-뭘. 회의 끝나면 바로 올게. 무슨 일 있음 연락하고.
-응.
아이가 학교에 가자 욕실에 들어갔다. 다 놓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찬물로 세수를 했다.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지하철역으로 뛰었고 환승을 하고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렸다. 전력을 다해 뛰는 동안에도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교정의 나무들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마침내 안녕하세요. 옥타브 솔로 인사를 하며 회의실에 들어갔다.
밝고 적극적이고 학문적인 회의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무거웠다. 가끔씩 웃음이 터지는 농담이 건네졌지만 자꾸 공을 떨어뜨렸다. 두어 차례 내게 질문이 향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차갑고 건조한 대답만 짧게 내뱉었다. 질문을 던진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의 당황하는 표정을 그대로 흡수했고 노트북 카톡창은 연신 노란색으로 깜빡였다. 그쯤 되자 회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연이은 수면 부족 때문인지, 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일들 때문인지. 그 모두 때문인지. 그것을 넘어선 또 무엇이 있어서인지. 마음에 그늘이 점점 짙게 드리워졌다. 2시간 반이 지나 회의가 끝났고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죄송하지만 다른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위당관을 나왔다. 낙엽은 역시나 눈부셨고 가을은 발아래 당도해 있었다. 말도 안 돼. 11월이라니. 올해는 정말. 뭐가 이래. 그동안 난 뭘 했지. 남은 두 달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마음의 추가 점점 무거워졌다.
유능한 사람들 속에서 유능하지 못한 이가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 발표하고 진행하고 의견을 내는 그들 속에서 정물이 된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느끼는 아이의 감정도 어쩌면 이와 같았을까. 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나 엄마야. 멘털 꽉 잡아. 11월 중순까지는 뭐가 됐든 참아.
조퇴하고 혼자 집에 있을 아이 생각에 마음이 조급한 와중에도 혹독히 자신을 단련했다. 삑삑삑삑 삑삑삑삑. 엄마 왔다. 백팩을 내려놓고 손을 씻는데 아이가 방에서 나와 등을 끌어안았다. 오늘은 엄마를 위해 음식 만들 거야. 절대 부엌에 오면 안 돼요. 응.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잔뜩 오른 안압에 눈이 뜨겁고 금방 눈곱이 맺혔다.
-엄마. 눈 뜨지 말고 내 손 잡고 이리 와요.
-셋 세면 눈 떠요.
-하나, 둘, 셋. 땡!
-와. 이게 다 뭐야? 너무 맛있겠다.
-와아! 소금빵이야?
-응.
-대단한데? 진짜 맛있다. 바삭바삭하고 부드럽고 짭짤하고.
-진짜? 진짜 맛있어요?
-응! 이제 크림토끼는 안녕이다~ 딸이 만들어 주면 되겠다!
-히히.
힘들어하면서도 24시간 내내 힘든 모습만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아이의 짧은 웃음에서 희망을 본다. 지난주에 내주셨던 상담 선생님의 미션.